ADVERTISEMENT

[BOOK책갈피] 몰락한 좌파 … 그래도 변한 건 없다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베르나르-앙리 레비 지음, 변광배 옮김
프로네시스, 459쪽, 1만8000원

베르나르-앙리 레비. 그도 벌써 예순이다. 스물 아홉의 나이에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의 저자로, 신(新)철학의 기수로 화려하게 시대의 아이콘이 됐던 그 철학자가. 적색(공산주의)과 갈색(파시즘)의 전체주의에 격렬히 저항했던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이며 저널리스트였던 그가 이젠 60의 나이다. 그러나 그에게 변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좌파다’.

이 책은 지난해 1월,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사르코지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비롯된다. 레비와 사르코지는 20년 이상 ‘친구’였다.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지식인을 ‘싹쓸이’하던 이 저돌적인 후보의 정치적 구애에 레비는 “좌파는 여전히 내 가족”이라고 밝힌다.

사르코지는 그를 조롱한다. “용기를 내게, 이제 침대에서 나와야지.” 사르코지에게 ‘좌파’는 침대 속의 백일몽이거나 죽어가는 병상의 환자였던 것이다. 레비는 이날의 고민으로부터 이 400쪽이 넘는 책을 써내려 갔다.

한국어판은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프랑스어판 원제는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사르트르의 표현)다. 인터내셔널판은 ‘좌파의 몰락’이다. 그러니까 한국어판 제목은 이 책의 ‘결론’이나 집필 ‘취지’로서 타당하다. 책의 내용은 오히려 몰락한 좌파, 그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이며 고백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좌파다.

레비는 복잡한 사유와 기가 질릴 만한 현란한 수사학, 특유의 백화점식 인용으로 가득 찬 이 저서에서 사실은 간명한 ‘좌파의 원칙’을 선언했다. 민족주의·국가주의에 대한 태생적 혐오에도 그 원칙은 ‘프랑스 좌파’의 원칙이 되는데 ^비시정부와 식민주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타협 없는 반성 ^드레퓌스 사건의 인권정신 ^68년 5월 혁명이 제시한 반 권위주의에 대한 철저한 옹호다. 이는 그가 말하듯 “미국인들이 보통 ‘자유주의’라고 말하는 입장”으로 이해하면 쉽다.

좌파의 신앙고백처럼 돼 있는 ‘반미주의’에 대한 독설도 여전하다. 그가 보기에 2차 대전 이후의 ‘반미 신봉자들’은 1930년대 극우파가 다져 놓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좌파의 반미주의는 없다. 반미주의 역시 바보들의 진보주의일 뿐이다”.

배노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