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100년전 선교사 “조선은 생명력 넘치는 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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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00, 조선에 살다
제이콥 로버트 무스 지음, 문무홍 외 옮김
푸른역사, 320쪽, 1만5000원

‘어린 시절, 나의 할머니는 당신이 태어난 아득히 머나먼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그곳은 푸른 초원, 맑은 강, 둥근 언덕들이 자리한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이국적인 언어를 말하는 다정한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미국의 투자전문회사인 제이콥스사의 제프리 제이콥스 회장은 어린 시절 할머니 낸시 체이니 여사가 들려준 신비한 나라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때묻지 않은 자연 속에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할머니의 고향, 그곳은 20세기 초반 조선이었다.

제이콥스 회장의 외증조할아버지 제이콥 로버트 무스는 목회자였다. 그는 서른다섯이던 1899년 아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선교 활동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스물다섯 해. 조선 땅에서 무스는 낸시를 비롯한 세 자녀를 얻었고 ‘무야곱’이라는 한국 이름도 얻었다.『1900, 조선에 살다』는 무스가 조선 생활 10년 만인 1909년에 발표한 책이다. 지금은 미국 의회도서관에만 한 부 소장돼 있는 희귀 서적이다. 허버트의 『조선의 역사』, 기포드의 『조선의 풍속』, 이자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등 구한말 이 땅을 찾은 외국인들이 기록한 조선 체험기는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무스의 책이 단연 돋보이는 것은 조선땅과 조선 사람에 대한 그의 애정이 행간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마을 입구에 자리잡은 장승 앞에 모인 사람들이 행운을 기원하고 있다. [푸른역사 제공]

‘조선에 대해서는 세상에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나 자신이 대단히 사랑하게 된 조선인들에 대해 독자들이 보다 명확한 지식과 더 깊은 애정을 갖게 되는데 이 책이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서문 부분)

‘푸른 눈의 조선인’이 바라본 1900년대 초반의 조선은 쇠락해가는 왕국이 아닌 생명력 넘치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책은 박물지에 가깝다. 한반도의 역사, 지리, 자연 환경과 생태계 묘사부터 시작해 당시 조선인들의 풍속과 그 속에 담긴 가치관을 그렸다. 무스는 도시와 지배 계급의 생활상보다는 농촌과 서민들의 삶을 조명했다.

‘조선의 수도는 서울이다. 그 발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것, 즉 영혼(soul)과 거의 비슷하다…서울은 진정 조선의 영혼이다. 삶의 중심이고, 사회, 정치 나아가 다른 모든 것들의 중심이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한다. 조선인들은 자기 나라의 수도를 말할 때 꼭 ’올라간다‘라고 표현한다. 수도 밖의 모든 것들은 이 나라의 ’아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64쪽)

관찰자가 아닌 내부자가 묘사한 한 세기 전 이 땅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생경하다. 무스는 열강의 침략에 고통받는 조선 백성 중에서도 특히 필요하나 이름없는 존재로 살아갔던 여성들의 수난사에 집중했다.

‘이곳에서 소년은 태어날 때 으레 환영을 받고 큰 축복으로 여기는 반면 소녀는 유감과 슬픔의 위로를 받으며 태어난다.…내 아내가 딸을 낳을 때 조선의 선비인 내 조선어 선생님은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큰 미소를 지으며 “아들이오?” 하고 물었고 나는 “아니오, 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깊은 동정의 표정을 지으며 “I am some sorry” 의미인 “참 섭-섭-합-니-다”라고 말했다.’ (144쪽)

그림 그리듯 구체적인 저자 무스의 묘사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100년 전 조선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이 든다. 저자 역시 서구인이자 선교사이기에 계몽주의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했다. 무속신앙이나 전통 습속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도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 땅을 사랑했던 한 외국인의 눈빛은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원제 『Village Life in Korea』.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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