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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기행>"오슬러의 그물" 힐러리 존슨 지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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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도시인,특히 직장인의 아침은 나른하다.푹 잔 것 같은 데 몸은 영 개운하지않다.『탈이 난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난다.
한때 『나,오늘 출근 안할래』『왜,피곤하니까』란 피로회복제 광고가 유행했다.샐러리맨들의 고소와 공감을 자아낸 카피였다.
피로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결론적으로 말해 피로는 병이다.그것도 심각한 병이다.
최근 미국에서 발간된 힐러리 존슨의 『오슬러의 그물』(원제 Osler's Web,Crown刊)은 흔히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만성피로의 실상과 위험을 고발한 의학서적이다.저자 자신이 이 질환에 시달린 데다 4백여명의 환자를 인터뷰하 고 다양한 임상자료를 동원해 설득력이 대단하다.
「피곤함」의 병명은 영어로 CFS(Chronic Fatigue Syndrome)로 표기되는 만성피로증후군.서구에선 이미 CFS를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최후의 공적(公敵)으로 상정한상태다.실제로 지난해 미국 질병통제센터(CDC) 는 앞으로 등장할,혹은 재발할 전염병으로 CFS를 제1번으로 꼽았다.에이즈나 암처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을 끝없이 괴롭히며 무력하게만들기 때문이다.책에 소개된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1=주부 에디 데이비스.발병전 풀타임 일을 두 가지나 하면서도 여섯 명의 아이를 키우며 원만한 가정을 꾸밈.활달하고억척스런 성격.89년1월 귀가 도중 미열 발생.이후 7년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하루의 반을 침대에 누워있음.
심할 때는 걷지도 못함.프라이팬이 달궈진 사실도 망각,수차례손과 팔에 화상을 입음.냄비를 태운 적도 여러번.
◇사례2=여변호사 린다 슬레펠.84년 갑자기 발병.86년까지이를 악물고 일에 매달렸으나 결국 실패.의사는 「전혀 이상이 없다」며 업무복귀를 권고.반면 일을 할수록 피로는 극심해짐.대인관계마저 단절.지난 10년 동안 거주지 밖으로 외출도 못함.
풍부한 사례에,특히 저자의 병력(病歷)이 덧붙여지면서 이 책은 강력한 설득력을 얻는다.그에게 CFS가 급습한 때는 86년.당시 30대 초반의 존슨은 2년여동안 여러 의사를 순례하며 원인을 찾아나선다.하지만 아무도 뚜렷한 설명을 못 해 CFS의실상을 저널리스트 시각으로 해부할 것을 결심한다.
의학계에 CFS가 처음으로 공식보고된 때는 84년.미국 네바다주 타호 호수 인근 마을 주민들이 집단 무력증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됐다.이 책은 그후 현재까지 CFS의 전개과정을 7백여쪽에 걸쳐 꼼꼼하게 훑는다.
저자는 CFS의 증상으로 초기엔 전신을 엄습하는 무력증과 함께 메스꺼움.두통.인후통.근육통.불면증 등으로 나타나다 IQ저하.치매.공간감각 상실 등 두뇌손상으로 악화된다고 말한다.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까지 몰고간다.또 에이즈처럼 아 직 면역성이없고 완치율 또한 20%를 밑돈다고 덧붙인다.
그러면 CFS의 원인은 무엇일까.불행히도 해답은 아직 안개 속이다.저자도 이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CFS가 바이러스로 감염되는 전염병이라고 일관되게 역설한다.신체기능 저하나 심리적 원인에 의한 무력증이 아닌세균에 의해 옮겨지는 질병이라는 것.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CFS가 처음 보고된 네바다주 마을을86년 방문했던 한 사업가가 3년 후 별다른 이유없이 발병한 사례 등을 들고 있다.의학계 일부에서도 그동안 바이러스 감염설등이 유력하게 제기돼 왔다.
존슨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이같은 실상을 외면해 온 보건당국의안이함을 질타한다.미국 질병통제센터와 국립보건연구소(NIH)가곳곳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임상 데이터를 무시하고 CFS를 전염병이 아닌 개인적 정신.신경질환이나 성격 결함 ,혹은 집단적 히스테리 등 심리적 차원으로 가볍게 처리했다는 주장.
또한 전염병으로 인정하면 발생할지도 모를 「심리 공황」을 우려,정당한 대응도 미뤄왔다고 고발한다.
이와함께 환자들의 아픔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없이 정부의 입장에 동조한 일부 의료계 인사들도 함께 공격한다.
이 때문에 책 제목도 환자의 증상을 철저하게 우선했던 영국출신의 내과의 윌리엄 오슬러(1849~1919)에서 역설적으로 따왔다. 지난해 하버드대 조사에 따르면 CFS에 감염된 미국인은 모두 2백만명에 이른다.존슨은 더 이상의 재앙을 막기 위해당국의 냉정한 현실인식과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우선 감염경로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위해 정부에 예산 배려를 요구한다.CFS에 대한 한국의 상황은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서울대병원 최강원교수는 『원인과 증상이 확인안돼 구체적인 임상통계는 아직 없다』며 적당한 운동과 고른 영양섭취를 예방법으로 제시했다. 존슨은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배너티 페어.롤링 스톤.보그 등 유력 일간지와 잡지 등에 글을 쓴 저명한 여류 프리랜서다.CFS에 감염되기 직전 그가 계획한 책은 TV에 관한이론서.그러나 86년 CFS의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고 「CFS 실상과의 전쟁」에 나서 9년만에 『오슬러의 그물』을 펴냈다.따라서 이 책은 사회로부터 냉대받았던 동료환자에 대한 애정과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또 책의 구상을 마친후 미국의 대형출판사인 맥밀런.세인트 마틴과 두차례 계약했으나결국 취소되고 세번째 출판사에서 나와 출판 자체도 책 내용만큼시련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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