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자금난 현장 르포] "內需 살아날 줄 알고 돈 빌렸는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 경기도 시화공단의 한 철강 가공업체가 원자재를 제때 구하지 못해 야적장이 텅비어 있다. [신인섭 기자]

자동차 관련 전자부품업체인 I산업(경기도 송탄공단)은 최근 거래 은행들이 대출금을 회수할 움직임을 보여 바짝 긴장하고 있다. 금융기관 대출금은 보통 1~2년 단위로 연장해 줬으나 올 들어서는 돈을 일부라도 갚으라는 독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은행은 신용등급을 강화해 이자율을 지난해(6%)보다 보통 1%포인트 정도 높일 움직임이다. 이 회사는 대출 규모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수십억원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회사 관계자는 "최근 매출과 이윤이 줄면서 재무구조도 악화된 상태"라며 "이런 상황이 몇달만 지속된다면 상당수 중소기업들은 부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인쇄회로기판 도금업체인 S서키트(경기도 시화공단)의 D사장도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고 해도 뚜렷한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공장.토지.집 등 전재산을 금융기관 담보로 잡혔다. 그것도 모두 3차 담보를 해 놓은 상태다. 3차 담보란 금융기관의 근저당 설정으로 돈을 이미 세차례나 빼 썼다는 뜻이다. 더 이상 부동산 담보를 잡히고 돈을 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D사장은 "기술 담보를 통해 자금을 얻는 방법도 찾아 봤지만 허사였다"며 "인쇄회로기판 도금의 상당한 기술력을 확보했지만 대출을 해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최근 중소기업들이 잇따라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다. 1~2년 전 대출금이 속속 만기 도래하는데 내수부진.원가상승 등이 겹치면서 중소기업들의 상환 능력은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중소기업 연체사태' 우려=기업은행 시화공단지점은 현재 1000여개 중소업체에 총 4600억원의 대출을 해줬다. 최근 1~2년 새 두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이 지점은 2002년까지만 해도 중소기업 대출은 2000억원 정도였다.

김문삼 지점장은 "중소기업들이 그간 대출을 받아 공장 부지와 건물비 등의 장기투자로 많이 썼다"며 "그러나 최근 내수부진 등으로 자금회전이 원활치 못한 기업이 크게 느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의 갑작스러운 부동산 투기억제책도 중소기업 자금난 악화의 한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부동산 담보대출 비율을 기준시가의 60%에서 40%로 내려 중소기업의 대출 상환능력이 덩달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중소기업의 연체율은 지난달 말 현재 2.8%까지 뛰었다. 금융기관의 빚 상환을 3개월 이상 연체해 신용불량으로 등록된 법인만도 13만3195개(은행연합회 발표, 1월 말 기준)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대출 규모를 줄이고 적극적인 상환에 나설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 대출을 안 해주는 대신 상환에 역점을 두겠다는 것이다. 올 들어 시중은행의 대출액이 ▶1월 3조8847억원▶2월 1조8324억원▶3월 5923억원으로 급감해온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또 금융기관들은 중소기업에 대한 채무 재조정, 출자전환 등 다각적인 대책 마련에 나섰다.

조흥.국민은행 등은 '기업회생 지원팀''워크아웃제'등을 도입해 일시적인 자금난에 내몰린 중소기업 회생 등을 위해 돕기로 했다. 이 밖에 우리.신한.하나은행은 워크아웃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내수부진.원자재난으로 더 악화=자동차 부품업체인 D정밀은 내수부진을 참다 못해 수출로 눈을 돌리고 있다. 최근 중국.태국 등에 직원을 급파했다. 일단 인건비라도 벌어 공장을 계속 돌리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내수가 살아나기만을 기다리다가는 부도가 날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이 업체는 지난해까지는 월평균 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나 올 들어서는 3억원대로 뚝 떨어졌다.

국내 경기가 반도체.휴대전화.선박 등 대기업이 주도하는 일부 특정 업종의 수출에 의해 지탱되다 보니 중소기업들은 침체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영향으로 중소기업 가동률은 67.1%(지난 2월 기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더구나 원자재 값이 뛰어 중소업체의 원가부담도 늘고 있다. 인상 요인이 없는 다른 원자재까지 덩달아 15%가량씩 올리고 있다는 게 중소업체들의 설명이다.

중소기업들은 이를 견디다 못해 대기업에 납품가를 올려 주고 결제기간을 단축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그간 꿈쩍 않던 대기업들은 중소기업 사정이 워낙 안 좋자 개선책을 내놨다. 주요 대기업들은 이달부터 납품업체의 원가 상승분 가운데 60% 안팎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대기업들은 어음 비중을 더 늘리고, 결제기간도 늘리는 추세다.

실제로 S서키트의 경우 상품 대금 중 80% 이상이 어음이고, 기간도 5개월 이상으로 늘었다. 외환위기 이후 한동안 어음 비중과 결제 기간이 크게 줄어들었으나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업체 관계자들은 전했다. 따라서 중소기업들은 요즘 물건은 팔리지 않고 제품 원가는 오르는 이른바 '샌드위치 신세'라는 호소다.

◇일부서는 '과장됐다' 반론=금융연구원의 서근우 비은행금융기관팀장은 "최근 논란이 되는 중소기업 대란설.벤처 대란설은 과장된 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같은 이유로 "현재 시중에 떠도는 자금과 은행권 자금은 최고 수준으로 풍부하다"며 "중소기업 관련 거시지표도 최근 몇년간 우려할 수준이 아닌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금융기관이 이런 여유 자금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벤처기업 대란설과 관련, "3년 전에 발행된 벤처CBO가 다음달께 만기가 돌아오지만 정부가 나서서 과도한 상환을 피하고, 연장해 주도록 권장하면 문제가 되지는 않을 전망"이라고 강조했다. 전국 어음부도율도 3월 중 0.06%로 전월(0.05%)과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정부도 자금동향 점검 나서=중소기업협동조합의 한기윤 상무는 "현재는 중소기업이 스스로 신용관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게 문제"라며 "정부가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에 대한 출연금을 늘려 자금난을 순조롭게 넘길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중소기업청 관계자는 "중소기업 자금동향을 계속 점검하고 있다"며 "내수침체가 장기화하고 심리적 자금압박 현상이 풀리지 않는다면 경기회복 차원에서라도 지원책을 강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시래(팀장.산업부), 홍승일(경제부), 장정훈.강병철(이상 산업부)기자
사진=신인섭 기자<shini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