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테 홍 ‘47년 만의 포옹’ 스토리 <상> 남편 “왜 이리 늦게 왔소” 짓궂은 농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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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오후 1시40분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평양행 중국 민항기에 올랐다. 기내에 들어서자 “이제야말로 북한 땅을 밟는구나”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비행기에는 우리를 포함해 중국인 등 불과 30여 명의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빈자리가 많이 보였는데 정원의 약 30%밖에 차지 않은 것 같았다.

47년 만에 만난 홍옥근씨와 레나테 홍 할머니右가 자녀들과 함께 평양 인근의 묘향산 보현사에서 가족 나들이를 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페터 현철씨(왼쪽 첫째)와 둘째 아들 우베씨(왼쪽 둘째)는 독일에서부터 어머니와 동행했다. 홍옥근씨가 북한으로 귀국한 뒤 재혼해 낳은 딸 광희씨中도 함께 했다. [레나테 홍 제공]

2시간40분의 비행 끝에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다. 승객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내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평양’이라고 적힌 대형 간판이 내걸린 공항 청사는 아담해 보였다.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서자 후덥지근했다. 날씨는 맑았지만 습도가 높았다. 초청자인 북한 적십자회 직원 두 명과 통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에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꿈에도 그리던 남편 홍옥근이 공항 청사에 나와 입국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충격을 받아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빨리 그를 만나게 되다니….” 큰아들 현철이와 둘째 우베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들은 입국 수속을 어떻게 마쳤는지 모를 정도로 잔뜩 긴장해 있었다. 마침내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낯익은 얼굴의 노신사가 한 중년 여성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시간이 멈춰진 듯했다. 47년 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우리와 생이별을 했던 남편 홍옥근이 분명했다. 여름 중절모를 쓰고 반소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차림새는 1950년대 동독 유학 시절처럼 깔끔했다. 나는 물론이고 두 아들과 남편은 잠시 우두커니 서서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곤 한 사람씩 포옹했다. 남편은 이 자리에 북한에서 재혼해 낳은 큰딸 광희(40)를 데리고 나왔다. 그는 “광희 밑으로 36, 33세 된 남동생 둘이 더 있지만 함께 오지 못했고 재혼한 아내는 많이 아프다”고 설명했다. 남편이 다소 어색하게 준비한 꽃다발을 내게 건네주었다.

내 마음속의 시간은 조금씩 다시 47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1955년 예나대학 화학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그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던 그는 매력적이었으며 자상했다. 60년 4월 결혼한 우리는 달콤한 신혼을 보냈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생이별을 해야 했다. 남편이 북한 당국의 동구 유학생 강제 소환 조치에 따라 61년 독일을 떠난 뒤로도 나는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공항 밖으로 나와 적십자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평양 시내로 들어섰다. 유경호텔·주체사상탑·인민문화궁전 등 북한 관광 안내책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 큰 건물과 조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는 천리마거리에 있는 호텔인 창광산여관 앞에서 멈췄다. 통역 아가씨는 이곳이 남편과 딸 광희가 머물고 있는 숙소라고 했다. 호텔에 들어가 30분간 적십자가 준비한 3쪽 분량의 북한에서의 일정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적십자회의 간부 이씨와 담당 여직원인 박씨는 “가족 상봉을 위해 외국에서 찾아오기는 처음”이라며 친절하게 대해 주려고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남편 홍옥근은 처음엔 약간 서먹해 했지만 곧 예전의 활달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는 47년간 독일어로 말해본 적이 없어 대화하는 데 약간 서툴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찾아왔소?” 그의 갑작스러운 짓궂은 질문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유학 시절에도 그는 농담을 즐겼다.

첫날 한 시간여의 아쉬운 상봉시간을 마치고 저녁 8시에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10여 분 후 문수지구 외교단지의 독일대사관저에 도착했다. 대사관 측은 북한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가 이곳 손님숙소에 머물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14시간여의 오랜 비행과 첫 만남의 흥분과 긴장 때문에 피로가 확 몰려들었다. 그러나 첫날 밤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리=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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