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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프리즘>장선우 감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영화 『꽃잎』이 5일 개봉됐다.광주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이 영화는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제작발표 때부터 국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을 뿐만아니라 CNN뉴스를 통해 촬영현장이 전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현대사의 가장 큰 상처로 기록될만한 사건을 주목받는 감독이 어떻게 형상화해 낼까가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이제 관객들의 몫이다.
장선우 감독을 만나 『꽃잎』을 통해 하고 싶었던 얘기와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 미를 갖고 있는지 들어보았다.
[편집자 註]영화감독들은 모자를 즐겨 쓴다.멋 부리기 위해 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야외에서 지내다 보니 모자 쓰는 게 버릇이 돼 평소에도 그러고 다닌다.장선우감독도 모자를 깊게 쓰고 나타났다.그에게는 왜 모자를 쓰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모자보다 헤어 스타일이 더 강하게 시선을 끌어당겼기때문이다.그의 머리카락은 철거해놓은 철조망을 쌓아놓은 것처럼 한 올 한 올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그 자유분방한 뒤엉킴이 마치 그의 브랜드처럼 느껴진 것은 왜 일까.
주변에서 장선우감독을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예측불가능」「탄력」「풍부함」「감각적」같은 말들이다.데뷔이후 그가 거쳐온 작품의 경향이나 개인적인 이력은 이 표현들의 물증처럼 다가온다.
7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해 탈반에 들어간다.선배들과 막걸리집을 돌며 안주삼아 세미나를 하던 시절이었다.75년 유신반대 시위로 도피생활을 하게 된 그는 1년뒤 검거돼 몇달간 콩밥을 먹게 된다(이때 도피생활을 뒷바 라지해준 여자 후배는 그의 아내가 됐다).
출소한 다음에는 구로공단의 한 회사에 보일러 기사 조수로 취직해 1년을 보냈다.영화는 80년 학교에 복학했다가 5.18로다시 학교를 떠나면서야 비로소 생각했다.
『80년 겨울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고 영화에서 희망을 찾았어요.때마침 황석영 선배가 자기 소설 「객지」의 남자 주인공으로 이장호감독에게 소개시켜준 게 인연이 됐어요.배우로 소개시켜 주었지만 체질적으로 배후에 남는 걸 좋아해 연출을 하게 됐어요.』 예측 불가능한 그의 럭비공 기질이 본격적으로 터진 것은 영화를 연출하면서부터다.『서울예수』와 『성공시대』까지만 해도 그는 당시의 암울한 정치현실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는 사회과학적인 상상력 속에 있었다.그러다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별볼일 없는 서울 변두리 인생의 일상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변화의진폭은 커진다.『화엄경』에서 들려준 부처의 목소리는 『경마장 가는 길』에서 욕구 불만에 찬 해외유학파 지식인의 불평으로 바뀌고,다시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관음 증 남자와 노출증여자가 합주하는 신음으로 변한다.
이런 변화무쌍함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실험정신을 대변하는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진실성을 의심받는 이유가되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이정하씨는 『장선우는 늘 평론가를 배신하고,관객을배신하고,자기 자신을 배신해 왔다』고 말한다.그에게 어떤 일관성을 기대한다면 이 배신의 미학을 고집해온 데서 찾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일관성 있게 매진하는 성실성을 의심하는 쪽입니다.특히나 우리 시대처럼 변화가 심한 때에는 사조 없음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세상의 구체적인 일상성에 눈을 돌린다면 한가지틀이 생기기 어렵다는 생각때문이지요.』 ***그 는 마흔다섯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것저것 실험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고 한다.『입시에 청춘을 탕진하는 10대들의 얘기도 생각중이고 김지하의 외로운 사상을 영화화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최근에 읽은 「창녀론」같은 소재에도 끌려요.이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구상이 진행된 것은 러브 스토리예요.아주 평범한 만남에서시작해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생각중입니다.』 산처럼 우뚝 서려는 태도를 싫어하고 물처럼 세상을 쓰다듬으며 스쳐가기를 좋아한다는 그는 영화도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한다.『그렇다면 「꽃잎」도 그렇게 스쳐가는 애인이냐.그런데 왜 그렇게 부담스러워한 것처럼 보이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광주는 「발원지에 두고 온 본처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80년 광주를 계기로 영화에 뛰어들었어요.광주를 영화화해야겠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숙제였습니다.처음엔 진상을 규명하는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악몽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어요.피해자들의 상처와 살아남은 사람들의 죄의식 을 씻어내는 제의 같은 걸로 생각했어요.결국 그건 제 자신을 위해 만든작품입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이번에 처음 울어보았다고 한다.『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만족스럽지가 않아요.대부분의 영화는 만들고 나면 만족스러운 편이었거든요.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15년동안 지고 있던 짐을 벗어버린 허탈함때문일까,아니면 무거운 의무감 때문에 자신의 장난기를 마음대로부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그는 『이번 영화가 나 자신에게 어떤 모습을 다가올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같다』고 한다.광주 라는 구체적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인간 내면의 폭력에 눈을 돌릴만큼 그는 사람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효 율때문인지 그의 어법은 잔가지가 없고 주로 목적어와술어만으로 적확하게 이어진다.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어떤 단어가 나올지는 그가 다음에 어떤 영화로 뛸까를 예측하는 것만큼 어렵다. 그의 생활,그의 어법,그의 영화인생은 예고편이 없다.
그 자신도 다음에 어떤 영화를 할지 아직 모른다.그는 현재를 즐길 뿐이다.YS가 1위,신영복씨가 2위를 차지한 「만나보고 싶은 서울대 선배」설문조사에서 자신이 9위에 랭크된 사실 에 유쾌해하고 플레이보이지를 사줄만큼 편안한 관계인 고3 아들과 보내는 한가한 시간을 행복해 한다.
그가 유일하게 미래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8세때 재능을 인정받고 실험을 거듭하다 만년에 어린 시절로 돌아온 추사 김정희처럼 자신도 언젠가는 『서울예수』로 돌아올 것이란 예감.그 예감은 자신만만함에서 나오는 것일까, 겸허함에서 나오는 것일까.
▶52년 서울생 ▶71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입학 ▶81년 이장호감독의 조연출로 영화 계 입문 ▶87년 『성공시대』로 정식데뷔 ▶89년 『우묵배미의 사랑』으로 백상 예술대상 작품상.
신인감독상 수상 ▶92년 『경마장 가는 길』발표 ▶93년 『화엄경』으로 베를린영화제 알프레드 바워상 수상 ▶94년 『너에게나를 보낸다』발표 ▶95년 『꽃잎』발표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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