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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싸움서 번번이 밀리는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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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국내에 있을 때보다 해외특파원 근무를 하면서 한국의 위상을 더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 해외에서 우리 기업의 활약상을 볼 때는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외교적 영향력을 보면 너무 초라해진다. 한국은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외교적 위상을 지켜나가고 있다.

일본은 독도 침탈을 노골화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북한은 한국을 아예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뒤통수칠 궁리만 하고 있다.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에서 한국은 북한에 또 당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던 금강산 피살 사건이 북한의 개입으로 막판에 의장성명에서 빠졌다. 새삼 놀랄 일이 아니지만 한국 외교력의 현주소를 다시 확인한 상징적 사건이다.

국제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 외교력의 수준을 한·중·일 3개국의 ‘외교 카드’ 비유를 통해 평가하곤 한다. 외교 협상에 나갈 때 한국은 달랑 한 장의 카드를 들고 나간다면 일본은 세 장, 중국은 열 장의 카드를 가지고 나온다는 것. 이런 비유는 독도 외교전에서 바로 확인된다. 한국은 신라 지증왕 때부터 한국 땅이었고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확실한 카드’ 한 장만 내놓는다. 반면 일본은 학술 대회, 교과서 교육, 지명 변경 로비 등 다양한 카드를 구사한다. 날강도 같은 주장이지만 체계적이고 일관되면서 일본의 주장은 조금씩 먹혀들고 있다. 일본은 100년 넘게 내다보는 해양 영토정책의 일환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 국회의원들이 즉흥적으로 독도를 한번 방문한다고 해서 일본의 이런 태생적인 영토 확장 야망을 꺾기는 어렵다.

외교 무대에서 카드 열 장을 들고 나온다는 중국은 늘 한반도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인다. 한·일 간에 독도 문제가 터지고, 남북 갈등이 생기면 이이제이(以夷制夷) 카드를 꺼낸다. 50개가 넘는 민족을 지배하면서 통달한 외교술 때문에 누구를 거들어야 이익을 챙길 수 있을지 본능적으로 느낀다. 말로는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3불(三不)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모르는 외교관은 없다. 3불은 남북이 통일도, 전쟁도, 교류도 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반도 정책이다. 한·일이 역사왜곡 문제로 갈등을 빚어도 중국은 한국 입장에 그다지 동조하지 않는다. 일본과는 경계하면서도 협력하는 ‘적과의 동침’ 관계이기 때문이다. 중국 경제에 이미 크게 의존하고 있는 일본 입장에선 중국을 껴안아야 평화도 얻고 경제적 이익도 얻는다.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강대국 사이에서 한국이 끼어들 틈은 별로 없다.

카드 싸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북한이다. 상대방이 어떤 카드를 내밀지 예측하는 학문인 게임이론을 적용하면 상대국의 움직임을 대략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분명한 것은 남한에는 어거지·무시·협박 카드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한국 일각에서는 독도 문제에 대해 북한이 남한과 공조라도 취해줬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냉혹한 국제정치는 그렇지 않다. 벼랑 끝 전술 카드까지 구사하는 북한에는 힘의 정치를 구사하는 미국도 두 손을 드는 정도다. 설마했던 통미봉남(通美封南)은 현실이 되고 있다. 금강산에서 국민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도 국제 사회에 나가 북한에 해명을 요청하는 딱한 실정이다.

한국이 북한이나 일본·중국처럼 어거지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외교적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다. 외교적 영향력은 국력에서 나온다. 국력이 허약하면 동북아 외교강국들은 계속 한국을 건드릴 것이다. 국력이 강해야 외교 무대에 가지고 나갈 카드도 많아지는 법이다.

김동호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