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新지리기행>21.전라도 지지里와 경상도 운산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호남과 영남을 관통하는 고갯길로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무주의나제통문과 육십령,그리고 팔랑치일 것이다.전북장수군장계면명덕리와 경남함양군서상면대남리를 잇는 육십령은 옛날 도둑떼가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육십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해 붙은 지명이라한다.지금은 잘 포장된 2차선 도로에 평소 제법 많은 차들이 고개를 오르내린다.
진안 마이산 밑에서 하룻밤 묵고 육십령으로 향하는 오늘의 길가에는 마침 마을이고 논밭에고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데 초봄의쨍한 아침 햇빛속에 드러나는 주위 산천은 그저 불가해한 신비속으로만 마음을 잡아끌고 있다.
조선 성종때 성리학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마이산을 바라보며 읊었다는 시구,『천지조화의 공교로움은 끝이 없는데,내 이제 가을비 온후 이곳에 오니 붉고 푸른 빛이 비단처럼 엇갈려 있어 진흙 찌꺼기같은 이 세상을 벗어났구나(부분발 췌)』라는 말의 뜻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게다가 그 지겨운 차들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으니 마치 별천지에 떨어진 느낌이다.도로를 전세내 달리는 듯해 미안한 생각까지든다.이럴 때는 직장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의 신세도 자랑스럽다.출근해야 하는 처지라면 평일의 이런 날 어찌 감히 이와 같은 호사를 생각이나 해볼 수 있으랴.
나는 기본적으로 지금 하고있는 행위가 생계유지에 관계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종류든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그런 것은 일이 아니라 취미나 오락일 뿐이라고 믿는다.일은 반드시 먹고 사는 일에 연결돼야만 한다는 고집 때문이다.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답사는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그로써 글을 쓰고 그로써고료를 받아 생활비로 쓰고 있으니 분명 일은 일인데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산의 신선같은 팔자다.그러다 보니 엉뚱하게도 길가의 월강리.삼봉리.명덕리 일대의 농촌마을까지 신선마을로 비친다.그곳에도 필경 삶의 고달픔과 고적감이 켜켜이 쌓여 있을 터인데 이 무슨 망발인가.
그러나 정작 육십령에서는 별다른 감회가 없다.산은 품안에 안기면 그 맛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일까.어머니의 품안도 있을 때는 그 안온함과 태평스러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떠나보면 그품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산도 마찬가지라 막상 육십령에서는 신비를 맛보지 못하는가 보다.하지만 이 역시 되지 못한 게으름뱅이의 하소연일 뿐 제 발을 써서 스스로 걸어 넘었다면 절대로 이런 궁색한 소리는 없었을 것이다.
산은 온 정성을 다해 접근할 때만 속내를 허용하지 않던가.이미 수많은 산행(山行)에서 그것을 체득했다고 여기면서도 막상 닥치면 헛소리가 나오니 아직 답사라는 소리를 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처지다.
함양땅으로 들어서서 송계리라는 곳에 이르면 남쪽으로 백전면 들어가는 지방도로가 나온다.그 길을 조금 내려오면 백운암 들어가는 도로표지판이 나오고 바로 그 아래 운산리 마을이 펼쳐져 있다.지난 초겨울 이 마을에 들어서보니 골골 집집 감이 지천이었다.감 딸 사람이 없어 그냥 둔다는 것이다.사람을 사면 하루5만원은 줘야 하는데 식초공장에서 사가는 가격은 ㎏당 4백원이니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1㎏이 일고여덟개,따지 못하는이유를 알만도 하다.구기자가 풍성 하게 달려 있는 집도 간혹 있었다.이것은 값이 좋아 곧 따내겠지만 감에 비하면 어림없는 양이다. 마을 북쪽으로 백두(白頭)의 백운산(白雲山)이 보인다.하지만 보이는 것이 백운산의 정상은 아니다.
백운산 세 봉우리,즉 상.중.하봉중 하봉만 보일 뿐이다.읍내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강배근 할아버지(60세)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하봉을 백운산의 전부로 착각했을 것이다.
이 백운산이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다.이 산을 이곳 사람들은 장군의 모습으로 인식한다.마을 남쪽에 계곡을 따라 길게 펼쳐진 들판 이름은 진두문이,백운산이란 장군이 이곳에서 진을 치는 형국이기 때문에 붙은 지명이다.정말 그렇게 보려고 한다면운산리보다는 양백리쪽으로 조금 내려와 양백교 부근에서 보는 것이 예에 흡사하다.
운산리에서 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산길을 오르면 중재가 나오고중재를 넘으면 전북장수군반암면지지리가 된다.산 이쪽저쪽에서 갈려 전라도와 경상도가 됐으니 당연히 지지리를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산길을 접어들어 보지만 이내 포기할 수 밖에 없다.근래에는 중재를 걸어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데다 내가 이곳에 갔을 때가 마침 겨울인지라 눈밭에 몸을 드러낸 산속을 아무런 대비없이 넘는다는 것은 산을 깔보는 일밖에 안된다는 것을 오래지않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선 함양읍으로 나와 숲이 좋다고 유명한 상림공원 옆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남원으로 길을 돌아 결국 지지리에 닿았다.마늘을 심고 있는 박현창 할아버지(68세)곁에 쭈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붙여보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 으시다.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더니 할 수 없다는 듯 몇 말씀 던져주신다. 한 20년전만 해도 이곳 사람들은 함양땅 운산리 시장을봐왔다고 한다.당시는 양쪽 사이에 혼인도 가끔 있었고 이승만 정권때까지만 해도 서로 시답지 않은 티격태격은 있었으나 그런대로 친하게 지냈는데 박정희정권 이후 서로 뜸해지고 말 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할아버지는 간단히 남원 가는 도로가잘 뚫려서라고 말한다.구태여 힘들여 중재를 넘어 함양장을 볼 것이 아니라 버스가 다니는 남원 가서 장을 봐오면 됐기 때문이란 것이다.
지지리 광대동마을 앞산은 광대가 관대를 쓰고 춤추는 형국이라는 풍수설화가 전한다.앞산이란 백운산이 남쪽으로 흘러 만들어놓은 월경산을 말한다.말하자면 백운산과 월경산은 같은 능선 위의두 봉우리니 결국 같은 산체인 셈이다.같은 산을 두고 함양에서는 장군이 진을 치는 형국으로 보았고, 장수에서는 광대가 춤을추는 모습으로 보았다.그래서 경상도에는 장군(將軍)이 많이 났고 전라도에는 예인(藝人)이 많이 난 것인가 하는,아무 짝에도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장계로 넘 어가는 무령고개로 들어선다.
오른쪽은 백운산이요,왼쪽은 장안산 군립공원이니 그 경치야 말해 무엇하랴.포장공사가 한창인데 이미 길가에는 민박집.닭집.보신탕집이 꽤 많이 들어서 있다.손님을 기다리는 개와 닭들이 저죽을 줄은 모르고 지나는 길손에게 어리광을 부린 다.이런 산에까지 와 몸보신을 해야 하는게 오늘을 사는 우리 사람들인가.
(전서울대교수.풍수지리연구가) 최창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