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린치 투자자들은‘편안한 마비’서 깨어나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3호 31면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편안하다는 건 고요한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고통이나 분쟁은 물론 없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의 메릴린치를 설명하는 데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는 힘들 것 같다.

2주일 전 메릴린치 최고경영자(CEO) 존 테인은 “메릴린치의 자본은 ‘매우 편안한 상태(in a very comfortable spot)’”라고 말했다. 올 2분기 메릴린치가 46억5000만 달러의 순손실을 냈다고 발표하는 자리에서다.

그런데 그가 이번 주엔 “진짜 편안함을 얻으려면 추가로 85억5000만 달러를 조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 시장이 법정이라면 그는 위증죄로 기소될 수도 있다.

메릴린치의 대차대조표가 이렇게 급변할 수 있을까. 내막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채권 등을 뒤섞어 발행한 부채담보부증권(CDO)의 가치가 폭락한 데 있다. 메릴린치는 최근 310억 달러어치의 CDO를 22%만 받고 사모펀드 론스타 계열사에 팔아넘겼다. 메릴린치는 액면가 가운데 75%를 나중에 받기로 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와 관련, 월스트리트의 한 전문가는 “1달러짜리 물건을 22센트에 살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이를 수용할지는 물건을 횡재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속 빈 강정으로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비유했다. 파격적인 가격에 산 CDO가 론스타 측에 횡재가 될지, 속 빈 강정이 될지는 메릴린치의 대출 부실이 앞으로 얼마나 될지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모기지 회사 등에서 사들인 서브프라임 채권 등을 뒤섞어 발행한 것이 바로 CDO라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전혀 믿을 만한 물건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메릴린치는 CDO를 창고 정리하듯 팔아 치우며 돈을 조달하고 있다. 메릴린치뿐만 아니다. 씨티뱅크도 80억 달러어치의 CDO를 추가로 털어 내야 할 상황이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CDO 물량이 쏟아져 나와 글로벌 시장이 요동할 정도다. 메이저 금융회사들이 자기자본을 지키기 위해 떨이 가격에 CDO 등을 팔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린 탓이다. 더욱이 이런 상황이 단기간에 호전될 것으로 보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메이저 금융회사들의 이런 행태 때문에 투자자만 골병이 들고 있다. 싱가포르의 국부펀드인 테마섹은 지난해 12월 26일 “메릴린치 경영진의 능력과 회사의 경쟁력을 믿는다”며 44억 달러를 투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영국 KNG증권 관계자의 평가는 의미심장하다. 그는 “테마섹이 여러 차례에 걸쳐 투자은행 주식을 사들임으로써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과시했다. 이는 은행 주식이 저평가돼 있다고 봤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니 은행 주식은 고평가돼 있었다”고 말했다.

메릴린치의 CDO 떨이 판매가 시작되면서 전설적인 록그룹 핑크 플로이드가 말한 대로 투자자들은 ‘편안한 마비(comfortable numb)’ 상태에 빠져 있다가 막 깨어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메릴린치의 대차대조표(재무구조)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