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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시볼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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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47~52년 일본 도쿄에서 미국 민간 관리가 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직책을 겸직한 인물이 있었다.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연합국 대일이사회 미국 대표 겸 의장이었던 윌리엄 시볼드(1901∼80)다. 정병준 목포대 교수는 그를 한·일 간 독도 분쟁의 불씨를 만든 핵심 인물로 본다. 계간 역사비평 2005년 여름호에 게재한 논문 ‘윌리엄 시볼드와 독도 분쟁의 시발’이 그런 내용이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시볼드는 1925년 주일 미국대사관 무관부에 근무하면서 3년간 일본어를 공부한다. 이때 결혼한 여성이 일본인 2세로 장인은 영국인 법률가, 장모는 일본인 화가였다. 30년 전역한 그는 미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딴 뒤 일본에서 장인이 운영하던 코베 법률회사를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 군 복무를 끝낸 그는 45년 도쿄 주재 연합국 최고사령관 정치고문단 특별보좌역으로 임명된다. 이듬해 특별시험을 거쳐 정식 외교관이 됐고 승승장구의 나래를 편다. 그에게 일본은 질서 잡힌 사회,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들, 성실하고 검약한 사회 기풍으로 감명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왕족, 고급장교, 정치인과 친밀했던 그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를 ‘일본의 처칠’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그가 영향력을 발휘한 시기가 연합국과 일본 간의 강화조약이 준비, 체결되는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당초 미국 측 강화조약 1~5차 초안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볼드는 49년 11월 미 국무부에 독도를 일본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 되었으며,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근해의 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내용이다. 그는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영유권 주장 책자도 미국에 보냈다. 이를 받아들인 미 국무부는 6~9차 초안에서 독도를 일본령으로 포함시킨다. 하지만 영국과 호주가 반대하자 미국은 한 발 물러섰다. 결국 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선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빠졌다. 일본은 이를 기초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54년 11월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이던 시볼드에게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데 대한 미국 측 견해를 물었다. 시볼드는 “제소보다는 양자 해결이 바람직하다. 일본은 주장을 계속하며, 태만에 의해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한국에 각서 혹은 여타 정기 공문을 보내야 한다”고 권고했다. 시볼드는 호주 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한국민의 분노의 뇌관으로, 한·일 양국의 우호선린의 걸림돌로, 국력과 외교력을 시급히 키워야 할 또 하나의 이유로…. 조현욱 논설위원

조현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