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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혹시 김홍도는 도슈사이 샤라쿠란 이름으로 일본서 열달동안그림을 그리다 온 것은 아닐까요?』 이자벨의 추리에 아리영과 아버지는 한동안 멍했다.
쇄국정책을 폈던 그 시절의 일본에 조선으로부터 몰래 들어가 사는 일이 가능했을까.
어쩌다 어부나 선원들이 태풍이나 해난사고로 표류하다 변방에 사는 수는 있었을테지만 김홍도는 조선 조정의 관리요,궁중화가다.상식으로 생각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단원(檀園)쪽에도,도슈사이(東洲齋)쪽에도 숱한 의문이 남는다.
우선 단원의 경우다.
단원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그래서 화원(畵員)으로는 드물게경상도 안동 부근의 안기(安驥) 찰방(察訪)을 지냈고,충청도 연풍(延豊) 현감(縣監)을 제수받았다.찰방은 요즘의 역장(驛長)같은 벼슬자리요,현감은 고을 원님이다.비록 중 .하위직이기는해도 특단의 예우였다.따라서 단원도 정성을 다해 관리노릇을 하려 했다.기근이 들었을 때 나라에서 내리는 구호용 곡식에만 의지하지 않고 제나름으로 노력하여 굶는 백성에게 죽을 쑤어 먹였다.그런데 「중매나 일삼고 하급 공 무원을 괴롭히며 사냥을 빌미로 세금을 거두었다」는 것은 곧이 들리지 않는다.그러나 그 일로 현감 자리에서 쫓겨나고 의금부는 체포령까지 내려 엄벌에 처하도록 결정했다.결국 왕명으로 옥살이는 모면했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의 단원은 참으로 비참했다.규장각의 임시직 대기화가 채용시험에 늘 응시하며 녹을 얻으려 무진 애쓰고 지냈으나늦게 얻은 외아들의 학비조차 못댈 만큼 가난했다.그의 눈부신 재능과 업적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몰락이요,푸대접이다.
도슈사이의 경우는 더욱 수수께끼 덩어리다.
불과 2백년 전 일이다.시시콜콜히 기록을 남기는 일본인이 유독 도슈사이에 대해서만은 깡그리 「백지(白紙)」다.태어난 해,죽은 해,출신지,가족관계 모두 불명.어느날 갑자기 어디서 와서별안간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그새 일본 지식층은 도슈사이에 대해 의아할 정도로 매우 냉담했다.그의 작품은 전혀 평가하려 들지 않았고 내내 무시했었다.
그러나 독일의 유리우스 쿠르트가 『샤라쿠(Sharaku)』라는저서를 1910년에 펴내자 사정이 달라졌다.
쿠르트는 도슈사이를 벨라스케스.렘브란트와 더불어 세계의 삼대(三大)초상화가로 꼽고 절찬한 것이다.
아리영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떠올렸다.『거울 속의 공주님』이란 명화(名畵)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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