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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박정희와 김종필·박근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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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희 대통령. 그는 지금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장녀 근혜의 화려한 부상(浮上)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을까. 아니면 5.16의 동반자요, 공화당의 사실상 계승자인 조카사위 JP의 처절한 몰락에 마음 쓰라려 할까. '박통' 그림자 2인의 극명하게 엇갈린 운명은 박정희와 3공의 공과를 되돌아보게 한다.

탄핵역풍으로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을 이나마 되살려 '폐허에서 희망을 안긴' 1등공신은 박근혜의 눈물 공세다.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훼 발언도 적잖은 기여(?)를 했지만 그걸 바람으로 엮어낸 건 역시 朴대표의 역량이었다. 이번 선거를 통해 그는 명실공히 제1야당의 지도자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朴대표는 유세기간 내내 아버지를 직접 들먹이지는 않았다. 당 선대위가 짜놓은 생가 방문 계획도 취소했다. 대신 朴전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연상시키게 하는, 그것도 밝은 부분만을 떠올리도록 하는 교묘한 전략을 구사했다. 전당대회장에서 그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았다"던 충무공의 장계를 인용했다. 朴전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던 위인이다. 지역을 순회하면서도 그는 "이 지역은 아버지가 각별하게 생각했던 곳"이라는 식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했다. 오히려 그러한 절제 전략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헤어 스타일과 어우러지며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더욱 자극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박근혜 효과의 실체는 8할쯤 박정희 향수였던 셈이다. 朴전 대통령이 숨진 지도 4반세기 남짓. 그가 딸의 비상(飛翔)을 통해 이번 총선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JP의 신세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지난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원내교섭단체에 실패하자 그는 "이거 엉망이 됐네"를 연발했다. 이번엔 겨우 4석에 그치는 대참패니 엉망도 보통 엉망이 아니다. 정당 득표도 3%를 넘기지 못해 대한민국 국회 첫 10선 의원이라는 거창한 꿈도 좌절됐다. 퇴진은 이제 자의반 타의반 행각의 마지막 버전이 되게 됐으니 "벌겋게 물들이겠다"던 JP의 서녘 하늘엔 보슬비만 내리는 형국이다.

JP는 지금껏 5.16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3공의 업적을 선전해 왔다. 기회있을 때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자랑하고, 배고팠던 시절 산업화를 일궈낸 성공담을 즐겼다. 그러곤 그때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박정권의 2인자요, 계승자로서의 행보에 충실했다. 때문에 JP의 몰락은 박정희 시대의 완전 종식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박정희의 또 다른 죽음이다.

딸을 통해 부활하고, 동시에 2인자를 통해 죽어가는 박정희. 그에게 묻고 싶다. "각하! 이 모순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배고픔을 극복하고 산업화의 기틀을 다진 경제중흥의 신화, 이게 박정희다. 장기집권과 인권탄압으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자, 이 또한 박정희다. 역사는 두 얼굴을 개발독재라는 말로 함축해 표현하고 있다.

김종필 총재에겐 미안하지만 그의 추락을 박정희의 어두운 유산에 대한 시대적 청산으로 해석하고 싶다. 군사 쿠데타, 중앙정보부의 인권유린, 유신 독재의 기억은 이제 4월 15일로 영원히 묻혔으면.

박근혜의 비상엔 그 반대 의미의 기대를 담고 싶다. 박정희의 밝은 쪽만 되살리는 계기로 작용돼 2만달러 시대의 새 신화가 하루빨리 쓰여졌으면.

이번에 박근혜 효과에 이끌린 사람 중 박정희의 독재 재림을 기대하며 표를 던진 이가 있을까.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朴대표가 박정희 독재의 망령을 불러와 지역주의를 되살렸다고 비판한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朴대표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