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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로 48년간 8명의 대통령 주물렀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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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20면

“1972년 5월 2일 오전. 재선을 노리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FBI 국장 에드거 후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완벽한 해결이었다. 그는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제때 죽었다. 운 좋게도 현직에 있을 때….’”『꼭두각시 부리는 사람:에드거 후버의 비밀』(리처드 핵·2004년)

‘밤의 대통령’ 에드거 후버 전 국장

미국 대통령이 왜 자신의 지시를 받는 FBI 국장의 죽음에 쾌재를 불렀을까. 닉슨은 후버의 사무실을 봉쇄했는지 확인한 뒤에야 사망 사실을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후버 사무실에 있는 X파일 때문이었다. ‘G맨(G-man·FBI 요원의 별칭)의 전설’로 불리는 후버(사진)는 1924년부터 48년간 FBI 국장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캘빈 쿨리지부터 리처드 닉슨까지 8명의 대통령이 재임했다. 후버의 장례식은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FBI 본부를 제외한 모든 관공서에 조기가 걸렸다. FBI 본부에선 “후버가 구현한 불굴의 용기를 기린다”며 조기를 달지 않았다. 장례식 당일 2만5000명의 조문객이 그가 묻힌 곳을 찾았다. 대중에게 그는 나라를 지킨 충직한 공복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사후엔 혹독한 평가가 뒤따랐다. 밤의 대통령, 미국의 법과 질서를 사유화한 사람, 불법 정보 수집으로 대통령까지 협박한 권력가, 워싱턴식 정치 음모의 원천, 민권운동을 탄압한 반(反)민주주의자….

후버가 FBI(당시 BOI) 국장에 발탁된 것은 29세 때였다. 그의 청렴성과 마피아·무정부주의자에 대한 소탕 작전을 평가한 할란 피스크 스톤 법무장관에 의해서다. 이후 16명의 법무장관이 그를 임명했다. 이들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해리 트루먼, 존 F 케네디 등 후버의 존재를 불편하게 생각하던 대통령들조차 그를 해임하지 못했다. 후버가 축적한 막강한 X 파일의 힘 때문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처럼 후버의 정보력을 지렛대로 정적들을 관리한 대통령도 있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는 데도 후버의 역할은 컸다. 30년대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대전, 냉전시대, 베트남전쟁을 거치는 동안 후버는 알 카포네 같은 갱단과 맞섰고, 극좌파와 극우 파시스트 등을 제압했다. 트루먼 대통령 시절인 1947년 미 중앙정보국(CIA) 창설로 잠시 위축됐던 후버의 위상은 50년대 반공 열풍(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을 타고 되살아났다.

그가 FBI를 세계 최고의 수사기관으로 발전시킨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반공주의 집착증과 불법 정보를 이용해 권력을 행사한 부분은 언제나 논쟁거리였다. 그는 진보적인 할리우드 스타, 언론인, 과학자는 물론 대통령과 가족들의 사적인 정보를 수집해 비밀 파일로 만들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집요한 감시 대상이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 심지어 존 F 케네디의 피격에 개입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62년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FBI 요원들을 보내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케네디의 흔적을 없앴다는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옛 애인의 관계,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의 사생활까지 추적했다고 한다.

후버의 ‘장기 독재’에 염증을 느낀 미 의회는 68년 법을 만들어 FBI 국장을 대통령이 임명토록 하고 상원이 인준하게 했다. 임기도 10년으로 제한했다. 1908년 찰스 보나파르트 법무장관의 지시로 스탠리 핀치 수석수사관이 특수요원팀을 이끈 이래 FBI 국장은 모두 16명이다. 로버트 뮬러 현 국장은 2001년 취임 일주일 뒤 9·11 테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테러 활동을 지휘하고 있다.

로버트 핵은 “후버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확보한 자료가 무엇인지 모르게 함으로써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후버 연구가들은 그를 ‘정보축적은 만인을 위한 것이며, FBI는 미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은 인물이라고 분석한다. 그가 쌓아둔 X파일의 두께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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