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인물로 풀어쓴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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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임경석 지음, 역사비평사, 300쪽, 1만2000원

‘건국 60년’을 기념해 정부·민간·학계의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9명의 사람들은 ‘건국 60년’ 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다. 조국을 빼앗긴 시절, 혁명에 생을 바친 이들은 남한 정부가 기억해 줄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바랬던 ‘건국’은 사회주의 조국이었다. 그러나 9명 중 4명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도 못했다. 해방이 더 잔인했던 경우도 있었다. ‘사회주의 조국’도 그들을 그다지 환영하지는 않았다. 혁명가였지만 ‘혁명 영웅’이 아니었던, 잊혀지고 버려진 그들의 생을 복원한 책이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운동사 연구에 매진해 온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가 이들을 되살렸다. 그는 “무서운 것은 세월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인지라 자료는 인멸되었고, 기억은 점차 색이 바라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망각 속의 존재다”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그들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경찰의 취조 문서와 압수 문건이었다. 그 기록은 곧 이들이 당한 고문의 증거다. 진한 피의 흔적 속에서 그들이 희미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책은 박헌영·김단야·김철수와 같은 많이 알려진 혁명가도 다루지만 윤자영·고광수 등 전문가들도 잘 접하지 못한 인물에 대해 애틋한 시선을 보낸다.

윤자영(1896~1938). 저자가 1931년에 작성된 일본 경찰의 정보 문서에서 처음 발견한 인물이다.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하며 조선과 중국, 러시아를 종횡무진 누린 혁명가다. 일본 경찰은 당시 서울·상해파 공산주의자 대검거 때 ‘수뇌 윤자영을 체포하지 못해 유감’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혁명가에 대한 기록도 끊겼다. 해방 이후 남과 북, 어떤 정권도 그를 기록하지 않았다. 저자가 찾아낸 윤자영의 최후는 비극적이다. 경찰의 수배망을 벗어나 모스크바로 유학했던 그는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반혁명 분자’로 몰려 총살 당했다.

혁명 동지였던 박헌영과 김단야 사이를 오간 여성 혁명가 주세죽(1901~53)의 엇갈린 운명, 와해된 지도부를 대신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으나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정신질환 속에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강달영(1888~1942) 등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혁명가’에 대한 기록을 모았다.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 쓴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이기도 하다.

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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