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패랭이 꽃씨가 날라온 작은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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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집안 사정을 안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눈치로 사는 법을 배운다. 그래도 때로 제 친구들과 비교하면 똑같이 치장하거나 내보이며 살 수 없는 형편이 원망스러운가 보다.

생활에 시달리다 보니 아침 일찍 나가 하루종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열중하다가 밤이 한창일 때에야 돌아온다. 이때면 아이들은 대개 바닥에 코를 쳐박고 자기 일쑤였는데 용케 둘다 깨어 있다. 어리둥절한 듯 보더니 환한 얼굴을 짓자 달려든다. 늦은 저녁을 먹고 밀린 일감을 마치도록 아이들이 옆에서 맴돈다. 그러더니 어리광하듯 하나씩 품에 안겨든다.

너무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불을 끄고 누워도 창밖 도심은 환한 채 불빛이 사그라질 줄 모른다. 뒤척이는 걸 보고 잠들지 않고 있던 큰아이가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언제 행복해질까요?"

"글쎄, 세상에 행복이 있기나 할까!"

귀찮은 듯 대답하지만 가슴이 찡하다. 아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예쁜 꽃이 있는 화분 하나 있었으면…."

"시간 있으면 사 올게."

조심스레 채근하던 아이가 떠올라 꽃집에 들른다. '행복을 주는 꽃가게'라는 이름에 며칠 전 아이 질문이 연상되어 남몰래 실소한다. 주인 아저씨는 넉넉하게 생긴 몸매에 사람 좋은 웃음을 띤다. 나 말고도 몇 사람이 앞서 화분을 사 간다. 작은 꽃나무를 하나 골랐다.

"틀림없이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호방한 너털웃음을 뒤에 남기고 서둘러 나온다. 물 주는 법과 가꾸는 법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집에 와선 기억나지 않는다. 일상적인 것만 생각하면 되겠지. 아이들이 좋아한다. 앙증맞은 꽃송이도 제법 달려 있다. 열심히 돌보는 것 같았는데 때로 시들기도 하다가 가을이 되면서 몇 남지 않은 잎마저 떨어졌다. 그렇게 추워지자 작은 꽃나무는 흔적도 없어지고 빈 화분만 덩그렇게 남았다.

'그러면 그렇지. 집에서 꽃나무 가꾸기가 어디 쉬운가!'하는 체념이 든다.

"쳇. 행복하게 해 준다더니… 순 거짓말이야!"

빈 화분을 볼 때마다 아이가 투덜댄다. 순진하게 아저씨 말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게 정성 들여 돌봐야 한다지 않았니!"

나도 아이들을 나무랄 수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화분을 밖으로 내보내야지 생각만 하다가 한 계절을 보냈다.

다시 봄이 와 우리 집 창에도 환한 햇빛이 든다. 어느 날 베란다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어디서 씨가 묻어 왔는지 빈 화분에 진분홍 풀꽃이 피어 한들거린다. 나도 모르게 감탄하는데 아이들이 달려왔다.

"햐! 이게 무슨 꽃이에요?"

"패랭이꽃이구나! 참, 예쁘기도 하다."

"갑자기 막 행복해지는 것 같아!"

나지막히 말을 하는 큰아이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정말 행복은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오는 것 같았다.

박정원 (48.서울 노원구 중계2동 중계그린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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