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정치인의 시계는 지금 몇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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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래전 일이다.시골에 사는 먼 친척 아저씨는 가난했지만 해박했다.그는 농사꾼이었지만 서울 돌아가는 사정에도 밝았고 유행에도 민감했다.그는 초여름 땡볕 아래서 밭을 갈 때면 왼쪽 손목에 가는 헝겊을 감았다.며칠만 지나면 왼쪽 손목엔 하얀 테두리자국이 남았다.
왜 그랬을까.시계를 찼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음을 안것은 한참 뒤였다.그 어른이 몇 해 뒤 진짜시계를 차고 다녔다.이웃사람이 도시에 유학보낸 아들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그는 왼손을 번쩍 들어 시계를 보고는 『한 달 전에 편지가 오고는 소식이 없네』라고 대답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시계는 이토록 귀중한 물건이었다.결혼준비물로 신부에겐 「다이아 3부」,신랑에겐 롤렉스 시계면혼수감이 대충 끝났다.대학입학땐 부모가 사준 손목시계를 차면서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고 그 시계를 학교앞 중 국집에서 몇 잔의 술과 자장면으로 맞바꾼 추억들을 하나씩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 시계가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신분과시와 재산가치로서의 의미를 잃어갔다.수동식에서 전자식으로,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제작방식이 바뀌면서 귀금속방 유리전시장에 보관됐던 시계가 거리의 가판대에 지천으로 깔리기 시작했다.시계는 이제 귀중품이 아닌 생활용품이 됐다.
시계란 앨빈 토플러가 지적한 대로 산업사회의 상징물이다.노동의 분업과 동시화(同時化)를 위해 시계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정해진 시간에 일손을 놓는 산업혁명의 필수적 도구였다.산업혁명이 앞섰던 영국에선 이미 1 790년대에시계는 귀중품이 아니었다.
우리의 산업화는 70년대부터다.「새벽 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는 노동의 동시화를 알리는 산업군가(軍歌)였다.
농경사회에서 시계란 의미가 없다.해시계와 배꼽시계로 농사를 충분히 지을 수 있었다.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로 바뀌는 시점에서 농사꾼 아저씨의 시계에 대한 동경은 농경사회에서 벗어나 산업화시대를 맞겠다는 절실한 욕구의 몸짓이었다.
그 시계가 90년대 정보화시대로 들어오면서 산업화 시대의 상징물로서 자리를 잃었다.직장마다 출근부가 사라졌다.9-6제 근무 시간제가 7-4제로 바뀌고 토요 휴무제가 보편화되며 근무형태도 조찬회나 심야 재택근무로 다양화되는 정보화시 대로 깊이 진입하고 있다.
정보화시대의 시간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것이다.강요의 시간이 아니라 자율의 시간 속에서 창의성을 개발하는 시대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선 아직도 시계를 존경하고 시계에 자신의 이름까지 박아 남의 손목에 족쇄 채워 한 표를 모으겠다는시대착오적인 정치인들이 있다.정치인이란 시대 흐름을 앞서 파악하는 경륜과 식견을 지녀야 한다.80년대 후반이면 이미 우리 사회도 산업화 후기에서 정보화시대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그러나92년 대통령 선거까지도 후보의 시계가 나돌더니 최근 「삼재 시계」까지 나왔다.아직도 산업사회의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한물 간 시계의 권위에 자신의 이름 을 새겨 동패의식을 확산하겠다는 발상이다.값의 고하가 문제가 아니라 시대착오적 발상이 문제다.마치 초기 예수교 신도들이 물고기 문양으로 서로의 비밀결사 조직을 연대했듯,시계에 이름을 새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 얼마나 시대착 오적인가.
농경사회의 우리 아저씨가 손목에 흰 자국을 남기려 했듯,남의손목에 자신의 시계를 채우려는 생각 자체가 아날로그식 농경사회의 의식구조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시대는 바야흐로 초중등학교에 인터네트를 연결하고 퍼지이론에 카오스 이 론이 휙휙 지나는 급박한 고속 정보화 시대다.한 달 뒤에 뽑힐 우리 선량들은 이 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며 20세기를 청산하고 21세기를 준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정치인들이다.우리의 정치인들이 아날로그 시대의 농경사회로 자신의 지 역구민들을 거꾸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정치 장래를 너무나 암담하게 한다.
1만6천원짜리 시계를 돌렸다고 그게 무슨 대수냐며 항변할 게아니다.시대를 역행하는 정치가의 의식이 어디가 잘못됐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게 우리 정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거꾸로 가는 시계를 찬 우리 정치인들의 시계는 지금 몇 시를 가리키고있는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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