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독서계에 일본 시오노 나나미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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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우리 지성계를 파고드는 한 일본 여류저술가가 있다.지난해 10월 혜성처럼 우리 곁에 나타난 시오노 나나미(59.염野七生).고대 로마의 1천년 역사를 다룬 대작 『로마인 이야기』(김석희 옮김)는 물론이고 고대 베네치아 공화국의 1천 년 흥망사를그린 『바다의 도시 이야기』(정도영 옮김),남성관을 담은 에세이집 『남자들에게』(이현진 옮김),마키아벨리의 핵심 사상을 모은 『마키아벨리 어록』(오정환 옮김) 등 그녀의 책은 소개되는것마다 예외없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 고 있다.지식인들이 주로 읽는 역사물 저술가로 국내에 소개된지 5개월만에 10만부 판매를 넘어섰으니 대단한 인기다(한길사 간).
일본 가쿠슈인(學習院)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이듬해인 1964년부터 줄곧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로마사에 천착해 온 그녀의 역사접근 방식은 아주 독특하다.리비우스의 『로마사』,플루타르크의 『영웅전』,디오니소스의 『고대 로마사』,폴리비 우스의 『역사』 등 철저히 고대및 현장 자료만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지명.인명.연도를 외우는 데 익숙했던국내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지적 충격일 수밖에 없다.국내의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고대 로마인이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바탕은 막강한 군사력이라는 것이 통설이다.로마제국의 쇠망 역시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패권을 장악한 민족의 교만 때문이라고 풀이됐다.그러나 지금까지 번역된 『로마인 이야기』 3권에는 로마제국 융성의 원천이 법과 제도로 그려진다.로마제국 패망 부분은 아직 집필되지 않은 상태여서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역시 기존의 시각과는 크게다를 것이 틀림없다.『로마인 이야기』는 2006년까지 매년 1권씩 15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지 금까지 소개된 3권은 로마공화정 성립 초기에 해당된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에서 몰락까지1천년의 역사를 다룬 베네치아공화국 흥망사.랑고바르드족에 밀려척박하기 이를데 없는 개펄에 삶의 터전을 잡았으면서도 베네치아인들은 과학과 기술로 부를 축적했다.소국 베네 치아공화국이 1천년 동안 용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사회.외교 정책이었다.
그녀의 표현대로 지성.체력.기술력.경제력에서 각각 그리스인.
게르만인.에트루리아인.카르타고인에 뒤졌던 로마인들,그리고 개펄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베네치아인들.그들의 생존투쟁에는 무한경쟁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배워야할 지혜가 가득하다 .
그녀의 글에는 야릇한 향기가 느껴진다.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자료인용이나 고증이 너무도 철저하고,역사서라고 부르기에는 문장이나 구성이 아주 극적이고 매끄럽고 감각적이다.
시오노가 30년 넘게 줄곧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그녀의 인기 배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그녀의 책에서는 일본 냄새가 나지 않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절묘한 조화가 느껴진다.세계주의라고나 할까.90년대 들어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취향은 정보와 흥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었는데도 국내저술가들은 그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시오노의 책들이 바로 그런 지식인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예컨대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는지 를 확인하기 위해 항상 줄자를 갖고 다닌다』는 시오노의 말은 국내 전문가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그런 태도 때문에 시오노의 책에서는 역사가 손에 잡힐듯 살아 꿈틀거린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시인 고은(高銀)은 『사실로서의 소설,문학으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시오노의 천부적 화술은 로마를 과거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의 실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감동을 전한다.
시오노는 오는 5월 한국을 방문해 국내 독자들을 만난다.이어7월에는 국내 독자들이 이탈리아를 찾아 작품의 배경이 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할 계획이어서 시오노 열기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일생을 3부로 엮은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르네상스 예술을 꽃피운 여성들의 이야기인 『르네상스의 여인들』등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도서출판 한길사에서 속속 번역.출간될 예정이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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