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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느닷없이 다가온‘재즈같은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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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는 옆에서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는 병희를 본다. 이건 욕심이다. 이렇게 순수하고 깨끗한 남자를 가진다는 건 이 남자를 더럽히는 것이다. 얼마 안 가서 이 남자를 피폐하게 만들고 말 것이다.

한국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의 자국(自國) 홍보 파티가 열린 특급호텔 연회장. 직업·나이는 물론 이름도 알지 못한 채 각자에게 주어진 번호표에 따라 파트너가 된 남녀가 왈츠 선율에 따라 플로어를 돈다.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상대방의 세포에 집중해야 하는, 섹스와도 같은 춤에 정신없이 취했다 깨어나 보니 음악은 끝나 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돼 있다. 박수가 터져나온다. 이어지는 옥션 행사. 첫 경매품으로 나온 스와롭스키 여성용 손목시계를 700달러에 구입한 남자는 “아름다운 파트너에게 왈츠를 춘 기념으로 시계를 선물하려 한다”고 좌중에 알린 후 여자의 손목에 채워준다. 여자는 주변 여자들의 부러움에 찬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정해진 수순처럼 연회장을 빠져나온 남녀는 남자가 투숙 중인 객실로 올라가 때로는 소년·소녀처럼, 때로는 간부(姦夫)와 요부(妖婦)처럼 사랑을 나눈다.

소설가 김이연(62)씨가 『그대였던가』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타투』에는 감각적이고 짜릿한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어찌 보면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성공하는 순간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배열됐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타투』는 30대 초반의 재즈 보컬리스트인 여주인공 윤이지와 20대 중반의 의대생 민병희가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났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갑년을 넘기셨는데 여전히 소설이 젊다”고 묻자 김씨는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 없는 소설은 할 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독자에게 서비스한다는 차원에서도 재미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1980년대 초·중반 김씨의 소설은 ‘재미’의 대명사였다. 김씨는 “신아일보에 연재했다가 80년 출간한 장편소설 『방황의 끝』은 20일 만에 2만부가 팔렸고 지금까지 판매부수가 35만부쯤 된다”고 말했다. 70년대 후반부터 방송 출연으로 얼굴이 알려져 생면부지의 독자들도 김씨를 만나면 출세와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소설의 여주인공 ‘설애’의 안부를 물어왔다고 한다.
소설이 벼락처럼 성공한 덕에 김씨는 한때 여성지 다섯 곳에 동시에 소설을 연재할 정도로 주가가 높았고 그 결과 80년대 초반 한해 평균 7권의 단행본을 냈을 만큼 스스로를 쥐어짰고, 그러다 소진했다.

김씨가 TV 브라운관에서 사라진 것은 7, 8년 전. “나이 들으니 보기 싫다는 거겠죠”라고 ‘방송 퇴출’을 설명한 김씨는 “최근 5년 간은 글쓰기를 작파하고 하두 잘 놀아서 무언가 소설에 빚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보따리 풀자마자 바로 싸야 하는 짧은 패키지 여행에 지쳐 한달가량씩 아프리카와 칠레를 다녀왔고 20년 경력의 골프도 꾸준히 쳤다”고 한다. 월간중앙에 ‘골프 에세이’를 연재하는 김씨의 실력은 보기 플레이 어 수준이다.

『타투』는 ‘옛날 얘기하냐’는 소리 듣기 싫어 김씨가 고심 끝에 내놓은 작품이다. 김씨는 “설애가 당시 여성들이 이룰 수 없는 목표였던 사회적 성공을 위해 몸을 던졌다면 요즘 여성들은 여가를 통한 자기 만족을 보다 중시한다”며 “이지는 그런 세태를 반영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영상 등 다른 매체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성애 장면도 더 노골적으로 처리했다”고 덧붙인 김씨는 멋쩍은 듯 “아직도 내가 철이 없다”며 웃었다.

신준봉 기자

*** 김이연

1942년생. 서울대 사범대 수학과 졸업. 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대표작 『상황의 끝』 『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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