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지리기행>15.전북 장수군 반암면 노단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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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전라북도에서는 지명을 나타내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쓰인다.
도내 동부 산간지방을 표현하는 무진장과 임순남이 바로 그것이다.마치 사람 이름처럼 들리는 이 말은 무주.진안.장수와 임실.
순창.남원을 지칭하는 것이다.이것이 그저 하릴없는 사람들의 말장난만은 아닌 것이 거기에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즉 무진장은덕유산의 품안이고 임순남은 덕유와 지리 사이에서 기를 모으는 역할을 하는 곳이며 남원 남쪽부터는 지리산이 시작된다.누구나 인정하다시피 덕유와 지리는 국토 남 단을 떠받치는 기둥산이다.
기를 모으는 역할이란 풍수에서 속기처(束氣處)라 불리는 것으로 모양이 벌의 허리처럼 잘룩하다 하여 봉요처(蜂腰處)라고도 한다.고무 호스에 흐르는 수돗물을 강하게 보내기 위해선 호스를꾹 눌러주어 물살이 세게 되도록 해야 하는데,땅 기운이란 것도그와 마찬가지로 기운을 강하게 하려면 그런 식의 장치가 필요해서 생긴 용어다.그러니 그런 땅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그런 곳은 강기(强氣)가 흐르기 때문에 중요할 뿐더러 취약하기도 하다.사람의 목 부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그래서 속기처가 되는 곳은 보호해야 할 곳이요 가급적 사람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땅이다.물론 목도리를 하는 것처럼 지맥(地脈)을보존하기 위해 취해지는 인공은 받아들일 수 있다.우리의 전통마을은 대체로 그런 정 도의 인공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일에서 예외다. 덕유산 남봉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자락에 삶터를 튼 장수는 그렇기 때문에 그 기상이 장군을 닮았으면서도 교만하거나뽐내지 않는 어머니의 포근함이 있다.어머니를 닮은 장군,절묘한지세랄 수밖에.흔히 말하기를 배짱은 두둑하나 마음은 세심하게 쓰는 소위 심소담대(心小膽大)를 지도자의 바람직한 덕성이라 하거니와 장군이 병사를 어머니처럼 보살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장수는 바로 그런 땅이다.
그 중에서도 반암면은 장수의 남쪽으로 곧이어 남원 운봉을 거쳐 지리산에 닿는 곳이니 속기처가 아닐 수 없다.노단리는 반암의 면소재지고,새터(신기)는 면사무소에서 섬진강 지류인 요천강을 건너면 만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그러니까 이곳에 풍수가 있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우리 풍수가 된다.그리고 바로 그런풍수가 이 마을에는 있었다.이름하여 챙이명당인데 챙이란 체의 이곳 사투리다.
체란 곡식을 담아 고르는 기구다.그 안에는 골라진 곡식이 담겨 있다.농본사회에서는 누구나 탐을 낼만한 성격의 터다.그리고그 모양도 영락없는 체다.체 앞에는 곡식을 고르고 남은 겨가 쌓여야 하는데 당연히 겨무더기라 불리는 둔덕이 챙이명당 앞에 놓여있다.이 겨 또한 체 속의 곡식보다는 못하지만 귀한 양식이다.그것을 먹으려는 개가 없을 수 없다.반암국민학교 뒷산이 바로 그 개에 해당하는 산인데 그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그 겨무더기를 지키는 호랑이가 반대편에서 버티고 있으니 그것이 범골의 호랑이 콧점배기(콧등)로 개를 빤히 마주 보며 자리하고 있다.그래서 개는 겨무더기를 향하여 뛰어들다가 흠칫 웅크린 형상을 하고 있다.
체와 겨와 개와 호랑이가 서로를 북돋우고 견제하는 상승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마을 경관상으로도 이 네가지 지물(地物)들은 마을의 동.남.북 3면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그 공간 구성이 안정돼 보인다.남쪽의 호랑이 산은 분명 살기를 띠고있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이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 호랑이가 겨무더기를 탐하는 개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을 것이므로 범의 살기가 마을을 침범하리라는 걱정은 할필요가 없다.풍수적으로 설화를 가 꾸어 마을이 지니고 있는 지세적 단점을 보완하고 있는 셈이다.체와 겨와 개와 호랑이,어느한가지만 빠져도 공간의 안정성은 무너지는 구조다.이것이 바로 자생적인 우리식 풍수의 건전성이 아닐는지.
옆집 아이를 업고 마실을 나서던 장정인(62세)할머니에 의하면 챙이명당 뒤로 개징우리(개의 복부)명당이란 것도 있다고 하지만 들일을 하고 내려오던 조봉제(76세)할아버지말씀으로는 그건 꾸며낸 얘기일 것이라며 부정하신다.만일 개징우 리명당이란 것이 개 모양의 산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개징우리에는 강아지들이 어미 젖을 빨며 옹기종기 아우성을 치고 있을 것이다.하지만어미 개가 문제다.눈앞에 겨무더기라는 먹이를 빤히 보면서도 호랑이 때문에 먹을 수가 없으니 속만 탈 수 밖에 없다.그러니 젖도 시원치 않을 것이고 강아지인들 뭐 좋을게 있겠는가.아마도할아버지 말씀이 옳은 듯하다.
새터마을의 풍수는 조화를 이룬 네가지 지물(地物)까지만 유효한 것이다.더이상 욕심을 부리면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무리가 되고만다.무리를 해서 좋은 일이란 없다.더구나 풍수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자연의 길 을 방해하지않는 것이기에 더 더욱 무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단리에서 요천을 건너 새터로 들어가다 보면 마을 입구에 관사풍의 건물이 서있다.무척 낡아서 마치 도시 빈민가의 연립주택처럼 보이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이곳에 금광이 있었다.이 건물은광원들의 집이었다고 한다.금광은 몇년 전에 폐광 되었다고 하지만 여하튼 금을 캤던 것은 사실이다.그렇다면 다른 금광지대에서나타나는 키명당 또는 삼태기명당과의 관련성은 없는 것일까.금에미치면 노름꾼과 비슷해지기 때문에 노다지를 잡은 금꾼들을 자연스럽게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지어낸 것이 바로 그런 풍수설화인데 내용인즉 키나 삼태기.체같은 것은 가득 차면 쏟아버려야하는 물건이므로 그런 명당에서 재산을 모으면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이 마을은 아닌 것같다.왜냐하면 금을 캐기 전에 이미 풍수설화는 완 성되어 있었으니까.
마을을 떠나기 전에 장할머니 댁에 잠깐 들러 보았다.백년쯤 된 집이라고 하는데 정말 고색창연하다.세칸 겹집 형태의 비좁고허름한 옛 농가,손바닥만한 마당 한귀퉁이에 쟁여놓은 장작더미,마당에는 팥을 널어 말리고 재목은 세월의 때를 타 새까맣게 반들거린다.볼품도 없고 가난만 어른거린다.하지만 무슨 까닭일까.
왜 이곳에서 그 그립던 진하디 진한 사람의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일까. (전 서울대교수.풍수지리연구가) 최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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