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축구 봐도 환불 못 받는 팬들 생각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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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호 12면

1998년 여름,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알렉스 퍼거슨(67·사진) 감독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히딩크와 다른 리그전의 강자, 퍼거슨 맨유 감독

“올드 트래퍼드(맨유의 전용구장)를 찾아주는 우리 고객들을 만족스럽게 해 줘야 한다. 멋진 플레이와 짜릿한 승리를 기대하면서 그라운드를 찾은 우리 서포터(열렬 팬)들은 맨유가 아무리 형편없는 졸전을 벌인다 해도 입장료를 돌려받지 못한다. 돈을 낸 손님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영광을 기대할 자격이 있다.”

퍼거슨의 열정적인 승부근성은 승리 그 자체보다 고객만족과 맞닿아 있다. 상대를 혼쭐나게 만드는 화려한 공격축구는 빼놓을 수 없는 팬 서비스 요소다. 퍼거슨 자신이 32세에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기까지 16년 선수생활에서 화려하진 않지만 격렬한 포워드 공격수로 활약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이자 열혈 축구팬인 시오노 나나미는 공격축구의 짜릿함을 알렉산더나 카이사르의 강렬한 전투 장면에 비유하곤 했다. 맨유는 ‘축구가 지닌 폭력ㆍ야만성을 현대적으로 가장 세련되게 순화한 팀’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공격축구 스타일로 무장한 맨유는 98~99년 시즌에 영광의 ‘트레블’을 달성해 축구사의 이정표를 세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와 FA컵ㆍ유럽챔피언스리그 세 대회를 한 시즌에 거머쥐는 전무후무한 대업을 이룬 것이다. 이 일로 그는 ‘퍼거슨 경’이 된다. 9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게 된 것이다.

기업경영에서 ‘고객만족’은 기본 중의 기본 개념이다. 하지만 ‘불량 축구경기 소비자는 환불받을 수 없다’던 축구 감독의 10년 전 발상은 예사롭지 않다. 경영학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퍼거슨의 맨유 경영이 학계와 기업들의 주목을 받은 지 오래다.

우선 인재를 장기적으로 육성ㆍ관리하는 끈기와 안목이 남달랐다. ‘퍼기(퍼거슨의 애칭)의 아이들’이라는 유년ㆍ소년 축구클럽을 구단 내에 만들어 될성부른 떡잎을 조기 발굴했다. 90년대 중반 맨유의 중추역을 한 데이비드 베컴이나 폴 스콜스ㆍ니키 버트ㆍ라이언 긱스 등이 여기서 컸다. 또 핵심인재를 골라 영입하는 혜안, 때론 비정하다 싶을 정도의 신상필벌, 코치에 대한 적절한 권한 위임 같은 용인술은 글로벌 제휴,과감한 시설투자, 장기적 브랜드 관리 같은 구단의 경영전략과 어우러져 경영학도의 연구과제가 되기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맨유는 지구촌에 7500만 명의 서포터들을 확보한 1조3000억원 가치의 글로벌 기업이 됐다’고 평했다.

‘퍼기 리더십’을 비즈니스의 잣대로 너무 재다보면 귀중한 반쪽을 놓칠 수 있다. 웬만한 성취에 만족하지 않는 끊임없는 도전정신이다. 스코틀랜드의 작은 항구도시의 가난한 조선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축구 선수와 감독의 꿈을 키우고 실현해온 과정이다. 심지어 ‘트레블’ 달성 직후에도 ‘나는 아직도 승리에 목마르다’고 외쳤다.

승리에 대한 그의 집념은 때론 ‘모질고 독하다’ ‘재사박덕이다’ 같은 악평도 많이 듣게 했다. ‘헤어드라이어 트리트먼트’라는 별명이 일례다. 툭하면 선수들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과정에서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이 헤어드라이어를 쬐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표현이다. 세계적 스타인 베컴도 혼쭐이 나다가 결국 방출됐다. 한번은 베컴을 야단치다가 바닥에 놓인 축구화를 발로 찼는데 베컴의 이마에 맞아 찢어지는 사고가 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한번 신뢰한 선수는 끝까지 밀어주는 의리의 사나이기도 하다. 프랑스 출신의 다혈질 스타 에릭 칸토나의 일화가 유명하다. 95년 한 경기에서 반칙 퇴장당하는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그 관중에게 ‘쿵후 킥’을 날렸다가 8개월 출장정지를 당한 칸토나를 퍼거슨은 끝까지 감싸고 변호했다.

그의 자서전 제목은 『인생 경영(Managing my life)』이다. 이를 집필한 언론인 휴 매킬버니는 “퍼거슨 스토리는 단순한 스포츠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축구를 통해 열정적이고 매력적인 개성을 표출한 위대한 삶의 일대기”라고 치켜세웠다.

퍼거슨은 월급쟁이 감독 이상이었다. 주주와 서포터에게 수익과 고객만족을 돌려주려고 주인의식을 갖고 오너처럼 구단을 이끌었다. 최고의 팀을 무려 23년 동안 이끌면서 프리미어 리그 10차례, FA컵 5차례 우승 등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이 기간 스페인의 명문팀 레알 마드리드가 20번 넘게 감독을 간 것과 대비된다. 맨유는 올해만 해도 프리미어 리그 2연패를 달성하고 라이벌 첼시를 누르면서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마저 거머쥐었다. 67세가 된 퍼거슨의 맨유 성공신화는 그 끝이 어디일까.



홍승일 기자는 중앙일보 경제부문 부에디터로 성공학이 주특기. 퍼거슨 감독의 자서전 『알렉스 퍼거슨 무한인생경영』을 번역했다. 공저로 『한국경제 먹여살릴 10대 산업』, 역서로 『전설의 10년, 90년대 미국경제 성공의 교훈』『객가 화교의 성공비결 99가지』『글로벌 경영의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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