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의 누' 차승원 주연 조선조 배경 스릴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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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붉은 피가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혈우(血雨)를 맞은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인다. 온몸이 붉게 물든 그들은

공포에 떨고, 하늘에 용서를 구한다.

피를 토하고, 자해도 한다. 다음달 4일

개봉하는 영화 '혈의 누'(김대승 감독)의

클라이맥스다. 조금 전 한 사람을

희생양 삼아 집단 살해극을

벌였던 사람들에 대한 응징이랄까.

세상의 부조리에 치가 떨린 하늘은

그들을 피로 정화하려는 태세다.

조선 후기 한 외딴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중요한 건 살인범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그 핏빛 잔혹극에 동조했던

사람들에게 하늘은

벼락같은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고….

▶ 영화 "혈의 누"는 조선시대의 한 고립된 섬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배경으로 권력과 탐욕의 문제를 파헤친 보기 드문 역사 스릴러다. 아래 사진은 주연 차승원이 말을 달리며 하얀 가면을 쓴 살인범에게 달려들고 있는 모습.

'혈의 누'는 겹이 많은 영화다. 도포 입고, 말을 달리는 사극과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현대 스릴러가 결합했다. 나아가 인간의 탐욕과 비겁함을 들춰내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양반과 상민, 과학과 무속, 이성과 광기도 충돌한다. 한국영화의 취약지대였던 스릴러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을 듯하다. 참고로 영화는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와 아무 관계가 없다.

◆ 범죄의 재구성 = 근대 산업혁명을 연상시키는 제지소, 종이를 육지로 나르는 포구, 상인.직공이 어울리는 주막 등 1808년 동화도(가상의 섬)는 활기가 넘친다. 그런데 이곳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잇따른다. 육지에서 건너온 군관 원균(차승원)이 수사에 나선다. 7년 전 처참하게 처형된 제지소 주인 강 객주(천호진) 일가가 죽은 방식 그대로 재연되는 살인극. 시신을 나뭇가지에 꿰고, 펄펄 끓는 가마솥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집어넣고, 사지를 잡아당겨 생체를 토막내고 등등. 섬뜩한 공포물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건 영화를 끌고 가는 장치일 뿐. 육지와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인간 관계가 객석을 더 끔찍한 공포로 몰아간다. '살인의 추억'처럼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 조선시대 법의학서인 '무원록'에 기초한 수사방식이 꽤 과학적이고, 천리경 등 각종 소품도 제법 현대적이다.

◆ 지옥의 묵시록 ='혈의 누'에서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날을 세운다. 합리적 이성을 대변하는 원균, 반상(班常) 구별 없는 세상을 꿈꿨던 강 객주, 강 객주에 충성을 다하는 염료공 두호(지성), 양반계급의 영속성을 추구하는 김치성 대감(오현경), 김 대감의 아들이자 현재 제지소의 실권을 잡고 있는 인권(박용우) 등이 얽히고설킨 그물망을 이룬다. 살인범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플롯도 정교한 편. 막판 깜짝 반전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뒤집히고, 또 뒤집히는 얘기가 피비린내 진동하는 지옥을 빚어낸다.

'혈의 누'는 '말아톤' 이후 이렇다할 작품이 없었던 충무로에 충분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랜만에 코미디 영화에서 손을 뗀 차승원이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무난한 탤런트였던 박용우의 변모도 놀랍다. '번지점프를 하다'로 충무로에 입문했던 김대승 감독의 탄탄한 기본기가 주목된다.

◆ 위대한 독재자 ='혈의 누'는 '포스트모던'하다. 이성.진보를 신뢰했던 모더니즘이 해체된 요즘 시대를 반영한다. 역사를 보는 눈도 그렇다. 성장.산업의 상징인 제지소가 무너지고, 무속.미신의 다른 이름인 만신당(萬神堂)이 부각된다. 과학정신으로 무장했던 원균이 자신의 이익관계 앞에선 힘없이 주저앉는 것도 그렇다.

양반과 상민에 대한 시선도 탈(脫) 근대적이다. 감독은 양쪽 어느 한 편도 지지하지 않는다. 명예.절도를 숭상하면서도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 바쁜 양반의 위선을 조롱하고, 그런 양반에 순응하면서 정의 대신 눈 앞의 돈을 선택하는 상민의 비겁함을 질타한다. 결국 남는 건 인간의 거대한 탐욕뿐. 최근 역사학계의 핫이슈로 떠오른 대중독재론을 보는 듯하다. '독재(양반체제)는 강요 아닌 민중(상민)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다'-사건의 실체를 훤히 꿰뚫고도 쓸쓸히 섬을 떠나는 원균은 그런 지식인의 모순을 대변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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