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우물'속의 선거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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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11총선도 이제 80여일밖에 안 남았는데 선거전이 처음부터 지나치게 수준 낮은 양상으로 흐르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우리에겐 극히 중요한 세기말(世紀末) 4년의 정치주역들을 뽑는 선거치고는 시대의 논점(論點)도 국정의 방향도 부 각됨이 없이정당들간의 유치한 소모전으로만 치닫고 있다.
도대체 선거철이라면 으레 국민의 관심을 끌 온갖 정책들이 쏟아져 나와야 할 텐데 올해엔 선거가 다가와도 정책은 보이지 않는다.정책은 안 보이고 대신 정당들간의 원칙 없는 마구잡이 영입경쟁과 그에 이은 이른바 색깔논쟁뿐이다.젊은 여 변호사가 없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는 것인지 다투어 여성법조인을 끌어들이고,전직장관및 학생회장출신들을 서로 모셔 가려는 괴상한 경쟁이벌어지고 있다.
그가 장관일 때는 죽일× 살릴× 하던 야당이 전직장관영입에 혈안인 것도 우습고 좌익이니 반체제니 하며 잡아 넣을 때가 언제인데 여당이 운동권출신에 추파를 던지는 것도 괴이한 일이다.
지금 보면 정치권은 영입경쟁과 상대방 헐뜯기외엔 할 일이 없는 것 같다.선거철이면 경쟁적으로 정책을 제시하고 다른 때보다민감하게 문제대응능력을 과시해야 할 텐데 우리정당들은 거꾸로 평소보다 정책에 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가령 일본에서 사회주의자총리가 물러나고 보수주의자총리가 들어섰어도 정치권에서는 관심도 없다.일본이 어디로 가며,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이 있고 우리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전혀 논의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얼마전 미국의 통상전문변호사들이 가장 만만한 협상대상국이 한국이라는,우리에겐 충격적인 지적을 했는데도 이 문제를 심각히 논의한 정당이 없었다.이런 지적을 받으면 즉각 우리쪽의 문제점을 따지고 협상능력의 강화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당 연하고,야당으로서는 정부공격의 호재(好材)라는 점에서도 문제를 제기해야 할 텐데 그저 조용히 넘어갔을 뿐이다.
지금 유엔을 위시해 미국.일본.유럽 등에서는 북한의 식량위기가 심각하게 논의되고 해외언론들도 이 문제를 연일 보도하고 있다.북한구호문제를 계기로 미.일 등의 대(對)북한정책 전환가능성 등이 논의되고 결국 이런 분위기가 우리의 대북 한정책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명색이 정당이라면 이런 상황을 민감하게 추적하면서 종합적인 대북(對北)정책 방향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어느 정당도 침묵일관일 뿐 관심조차 있는 것 같지 않다.
지금 세계 각국은 세기말과 21세기에 대비한 국가경영전략에 각기 최고의 두뇌를 모아 있는 지혜,없는 지혜를 다 짜 내고 있다.정부와 민간의 역할,기업의 특화(特化)와 효율단위,「경제하기 좋은 여건」의 조성,산업별 경쟁력 및 우위확 보전략이 나라마다 중심의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지도층들은 누구를 어느 지역구로 보내고 누가 더많은 명망가를 꼬시는가 하는 경쟁만 하고 있다.선거철의 당연한현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경쟁의 수준이 낮고 유치하다.선거철이면 없는 안목이라도 있는듯이 해야 할 텐데 평소보다 더 노골적으로 이기적(利己的)욕심만 드러내고 있다.
정치권은 경쟁을 하더라도 부디 경쟁의 질(質)을 높이고 시야를 좀더 넓히기를 바란다.여변호사와 몇 명의 전직장관.대학학생회장 출신을 놓고 경쟁을 하기엔 이 나라가 너무 크고 발전해 있다. 연구가 제대로 안돼 있겠지만 21세기 경제구조를 놓고도경쟁을 하고,당장 올해의 경기연(軟)착륙과 중소기업문제를 놓고도 논쟁을 하기 바란다.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국내경제나 서민들의 생활이 어떤지는 관심도 대책도 없으면서 입으로 만 개혁이 어떻고 색깔이 어떻고 하는 정치를 국민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지난해 9월인가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사설에서 한국정치가 무익하게 내향적(內向的)이 되지 않길 바란다고 쓴 것이 기억난다.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국이 더욱 내향적이 되겠지만 정치가 내쟁(內爭)을 계속하는 순간에도 역사는 전진하며 국 제정치는 변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외국언론의 충고도 충고지만 정당지도자들은 지금 시중의 여론을 들어 보기 바란다.마구잡이 영입이나 색깔논쟁을 두고 보통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를 한번 귀울여 보라.
저차원.저질의 경쟁에서 누구라도 발을 먼저 빼는 쪽이 선거에서의 승산도 더 있을 것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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