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장편소설 "법" 뒤렌마트 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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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얼마전 법으로 밥을 먹고 사는 「법쟁이」들이 『성공한 내란은처벌할 수 없다』고 말했다.거기까진 고개가 끄덕여졌는데,그 말의 보증인으로 법학자 옐리네크나 켈젠 같은 유령들까지 무덤에서모셔왔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면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유당 시절 어떤 주먹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일찌감치 갈파(?)한 바 있다.이렇게 쉬운 말을 두고 왜그리 돌아서 가는지,법쟁이들은 원래 그 런가 싶기도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법,즉 정의의 위기는 법을 짓밟으려는 주먹보다 법 자체의 허점에 의해 초래된다는 것을 뒤렌마트의장편소설 『법』은 보여준다.
어느 훈훈한 봄날 저녁 프랑스산 붉은 포도주가 별미인 스위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몇 십명의 손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주 참의원이기도 한 이자크 콜러 박사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 빈터 교수를 권총으로 쏘고 돌아간 것이다.순순히 체포된 콜러 박사는 정신도 멀쩡한 상태인데다 살해 동기는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 명명백백한 살인범을 심판하는 데 법이 할 역할은 미미해 보였다.그저 법조항 몇개만 빌려 주면 될 듯싶었다.. 그러나 이 재판은 살인도구인 권총도 못 찾은데다,증인들의 진술이 얽히고설키는 바람에 살인범을 무죄 석방한다.재판 과정에서오히려 무고한 사람이 살인 혐의로 몰려 자살까지 하고 만다.
뒤렌마트의 『법』은 이런 기발한 착상과 결말의 극적 반전으로OJ 심슨만 아니었더라면 두고 두고 평가받을 만한 소설이었다.
한데 최첨단 과학이 증거를 대고 몇백만명이 백주의 도주극을 지켜봤지만 정의를 거뜬히 「사들여」석방된 심슨 때문에 그 기발함이 바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위안을 받아야 하나.두말할 나위 없이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면서 개인적 테러를 통해서라도 추락한 정의를 복구하려는 신출내기 변호사 슈패트다.「진실」의 품안에서진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 『정의는 오로지 범죄로서만 회복될 수 있다』고 외쳐야 했던 슈패트야말로 한때 우리들의젊은 초상이 아니던가.
이 소설 내내 술이 아닌 정의에 취했던 슈패트가 알콜중독자로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애용한 싸구려 과일주 배치를 비롯해 맥주.스트레이트 위스키.스카치.위스키 식스티 나인.버찌 브랜디.화주.사과주 향내가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것도 책읽 는 재미와 무관하지 않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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