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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38. 신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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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가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로 끌어들인 홍승면.

어느 날 화신 근처로 가다가 꾀죄죄한 차림의 홍승면(洪承勉)을 만났다. "운사, 나 곧 제대하는데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직장 좀 마련해줘"라고 부탁했다. 그는 서울대 예과 때부터 괴상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좌익이 세게 나올 때, 다리 하나가 부러진 안경을 실로 이어 끼고 다니던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정신적 테러가 아닐까요?"라면서 정연한 이론을 전개하던 친구다. 경기중을 다닐 때 '소요가(逍遙歌)'를 만들어 소동을 일으키고도 일본 히로시마(廣島)고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뭐 하나 써 오라"고 주문했다. 그가 써 온 것은 그때 막 눈을 틔우기 시작한 통일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것을 주요 논문으로 실었더니, 연세대와 이화여대 학생들이 신문사 앞에서 연좌 데모를 벌였다. 밖에서 들어오던 장기영 사장은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그 사람 지금 뭘 해요?"라고 물었다.

"저하고는 예과 동기동창인데요, 미군 연락장교를 하다 제대했습니다."

"우리한테 끌어들일 수 없을까요?"

"영어를 잘 하니까 처음부터 직위를 좀 줘야 할 겁니다. 외신부 부장 정도요."

"당신은 평기자 아니야?"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홍승면은 차장대우로 외신부에 들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실력이 진가를 나타냈다. 부드러우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칼럼을 썼다. 어느 날 입구에 게시돼 있는 인사 명단을 보고 나도 놀랐다. 홍승면과 내가 부장으로 승격된 것이다. 이 때부터 '장뚱뚱이'(張사장의 애칭)와 우리들의 역사는 새로 엮어졌다.

한국일보는 청년신문이라는 평을 받았다. 대학가 등에서 신문의 기백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견습기자를 모집했다. 각 대학의 수재들이 몰려왔다. 나중에 문공부 장관을 지낸 이광표(李光杓).김성진(金聖鎭).이원홍(李元洪) 등이 예리함과 기동성을 발휘해 주었다. 위로는 석천(昔泉) 오종식 선생을 비롯해 경제평론의 주효민(朱孝敏), 일기당천의 천관우, 백전노장 김용장(金容章), 홍유선(洪惟善) 등이 있었다. 기존 일류신문에 꿀릴 게 없다는 자세로 일했다. 활기찬 진용이었다. 그러나 '왕초'(張사장의 다른 애칭)는 종종 슬리퍼를 타닥타닥 끌고 편집국에 들이닥쳐 "이 월급 도둑놈들, 뭘 하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사회부의 이목우(李沐雨)가 어느 날 담뱃갑에 들어 있는 은종이에 그린 그림을 내보이더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상한 그림이다. 모두 벌거벗은 남녀가 이리 얽힌 것도 같고 저리 뒹구는 것도 같다. 피카소를 흉내낸 것인가?

"뭐요 이게?"

"대구에 이중섭(李仲燮)이라는 화가가 있어요. 이 사람 한번 세상에 소개했으면 좋겠는데…. 시인 구상(具常)하고도 친한 사이예요."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주었다. 숨어 있던 이중섭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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