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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트 머독의 호주 뉴스코프社, 미국으로 국적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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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현재 한국 증시에서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와 2위인 SK텔레콤 같은 거대기업이 한국 기업임을 거부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까. 단지 한국 기업이라는 이유로 다른 글로벌 기업에 비해 주가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를 감안하더라도 이들 기업이 아예 본사와 국적을 다른 나라로 옮기는 극한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호주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세계 5위의 미디어 기업인 호주의 뉴스 코퍼레이션(뉴스코프)은 6일(현지시간) 본사를 호주에서 미국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뉴스코프는 또 자사 주식을 시드니가 아니라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주로 거래하겠다고 밝혔다.

뉴스코프가 매출과 수익의 75% 이상을 미국에서 올리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본사 이전이 전혀 뜻밖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대표기업이 국적을 바꾸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뉴스코프는 호주증시에서 세계 최대 광업회사인 BHP 빌리턴에 이어 시가총액 2위 기업(460억달러)이며, 호주증시의 대표지수인 ASX/S&P200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에 달한다.

뉴스코프의 루퍼트 머독(73.사진)회장은 주가의 저평가를 막기 위해 본사 이전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머독 회장은 "뉴스코프는 기업의 뿌리나 정서, 문화 측면에서 분명 호주 회사지만 외국회사라는 이유로 미국 시장의 대형 투자자들이 주식 매수를 꺼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실적은 좋은데 단지 호주 회사라는 이유로 주가가 디스카운트됐다는 것이다. 뉴스코프는 이번 미국행으로 더 저렴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로써 1952년 신문 두 개를 발행하는 조그마한 기업에서 출발해 '해가 지지 않는 미디어 제국'으로 도약한 뉴스코프는 호주에서의 50여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머독 회장 자신은 이미 85년 미국 방송국을 소유하기 위해 호주 국적을 버리고 미국시민권을 취득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AWSJ)은 7일 시드니발 기사에서 "뉴스코프가 호주에 한 방을 날렸다"고 보도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도 "뉴스코프가 호주 재계에 심리적인 충격을 안겨줬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호주 재무부는 뉴스코프가 본사를 이전하려면 정부 해외투자심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는 국익에 부합하지 않은 해외 투자를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 권한이 발동된 사례는 거의 없다. 이런 우려의 분위기를 감안해 머독 회장은 앞으로도 호주 미디어 사업을 계속 충실하게 운영할 것이며 주식 일부도 호주증시에 계속 상장된다고 강조했다.

FT는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게 되면 뉴스코프는 S&P 500지수에 포함돼 인덱스 펀드들이 뉴스코프 주식 매수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FT는 "호주가 자국의 글로벌 기업을 또다시 해외로 빼앗기면 호주 금융시장에는 실제로 비상벨이 울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머독 회장은 "미국에서 미디어의 크기 자체가 중요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디즈니 등과의 합병 전망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는 앞으로 폭스 엔터테인먼트와 디렉TV 등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뉴스코프 같은 거대기업이 국적을 바꾸는 사례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해운업계에서는 이러한 '국적 쇼핑'이 이미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해운업계에는 '편의치적(便宜置籍)'이란 이름으로 해운선사나 선주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세금 부담이나 규제가 적은 국가에 선박을 등록하는 관행이 있다. 기업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국가마저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최근의 추세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문지원 수석연구원은 "법.제도적인 장벽 때문에 국가 기간산업인 SK텔레콤이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가 본사를 해외로 옮기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호주처럼 대표기업을 다른 나라로 빼앗기게 되면 세수(稅收)와 일자리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국가 이미지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한국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려면 기업을 이해하는 관료들이 생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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