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시’ ⑬- 『강물도 목이 마르다』 이원규 시집, 실천문학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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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 날다

저기 저 당산나무
팽나무 그늘 아래
돌탑 속의 깨진 돌멩이 하나

저도 언젠가는
새처럼 날아오른 적이 있으리

누구인가
장난삼아 던진 돌팔매가 아니라
스스로 날아오른 적이 있으리

파경(破鏡)의 화석을 보면 알리라
물고기처럼
뼈만 남도록 헤엄치던 시절과
고사리 푸른 이파리처럼
아주 낮은 목소리에도
자주 흔들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내 몸속의 담석 하나
사리, 진신사리도 아닌 것이
아주 천천히 반역의 날개를 펴고 있다
-<돌> 전문

시인들의 상상력은 참으로 남다르다. 이원규 시인은 돌멩이가 하늘을 날았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 장난삼아 던진 돌팔매”로 돌멩이가 하늘을 날았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날아”올랐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가당한 노릇인가? 혹시 당신은 돌멩이가 하늘을 난다고 꿈꿀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돌멩이를 잠시 꿈꿔보자.
돌멩이 혹은 돌은 자신의 일부는 땅과 맞닿아 혹은 땅 속에 두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땅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돌은 나무-물과 비슷하다. 하지만 뿌리를 땅 밑에 감춰두고 있는 나무는 제 머리와 몸통과 사지를 하늘로 들이댐으로써 수직과 상승의 이미지를 보유한다. 물 역시 땅과 땅 밑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는다. 하지만 물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흐름으로써 자신의 운동성을 증명한다. 반면 돌은 그 어떤 운동성도 드러내지 않는다. 돌의 자리는 늘 같은 자리이며 같은 모양일 뿐이다. 돌은 부동성의 상징이다.
나무와 물은 자라고 또 흐름으로써 죽거나 산다. 늘 같아 보이면서도 늘 다르다. 곧 스스로 생명을 영유하고 있는 이미지인 셈이다. 반면 돌은 차라리 늘 죽어있거나 늘 멈추어 있을 뿐이다. 혹은 그 스스로 생명의 운동을 보여줄 수 없다. 돌에 낀 이끼는 돌의 몫이 아니라 이끼의 몫이다. 돌은 침묵과 죽음의 상징이다.
그러고 보니 위 시에도 공교롭게도 나무와 물의 이미지가 함께 등장하고 있다.
4연의 “물고기”와 “고사리 푸른 이파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물고기와 고사리 푸른 이파리가 변한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돌이라는 사실이다. 곧 “물고기처럼 / 뼈만 남도록 헤엄치던 시절”과 “고사리 푸른 이파리처럼 / 아주 낮은 목소리에도 / 자주 흔들리던 시절” 이후의 모습이 돌이라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지 물고기는 헤엄을 칠 수 없고 고사리 푸른 이파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아우성에서 침묵으로, 운동에서 부동으로, 생명에서 죽음으로 주체의 상태가 변환된 것이 바로 돌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 까닭을 “파경”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파경(破鏡)? 깨진 거울? 파기된 약속 혹은 인연?
시인은 파경의 원인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다만 “돌탑 속의 깨진 돌멩이 하나”를 보며 그 파기된 약속 혹은 인연을 다시금 강력하게 환기한다. 시인은 파경과 관련해 스스로를 하나의 돌멩이라고 고백한다. “사리, 진신사리”는 비록 아니지만 “담석 하나”가 자신의 몸 안에 있고 그 담석이 이제 막 “반역의 날개를 펴고 있다”고 선언한다. 깨진 거울인 자신의 몸을 돌멩이의 이름으로서 날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돌멩이가 된 시인이 하늘을 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쉬지 않고 걷는 것이다. 한시도 멈추어 있지 않는 것이다. 마치 물 속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고사리 푸른 이파리처럼. 다음 시에서 말해지듯, “발바닥이 곧 날개”가 된 것처럼.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족필(足筆)> 전문

시인은 지독히도 걷는다. 그 정도는 “바람 불면” “바람의 이불을 덮고 / 꽃이 피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쓸 정도이다. 그리고 아예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 슬픈 나의 여인숙”이라고 선포할 정도에까지 이른다. 또한 꽃들을 자신의 여인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노숙자”여야 가능하다라고도 말한다.
이때의 노숙이란 정주와 기다림이 아니라 떠돎과 찾음의 다른 이름이리라. 안온이 아니라 갈망이며, 순응이 아니라 반역이리라. 인정이 아니라 각성이며, 기지(旣知)가 아니라 미지(未知)이리라. 그렇게 세상을 떠돌 때야만 “발바닥이 곧 날개”가 될 수 있고, 비로소 돌이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알게 된 것일까? 돌멩이가 하늘을 나는 이유와 그 광경을!
시인이 돌멩이를 하늘로 날아오르게 만든 것은, 앞 시에 등장하는 “파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리고 그 까닭과 연유를 알기 위해서는 시인의 다른 시들을 좀 더 검토해야겠지만, 어쨌든 시인은 그 파경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한 자루 필생의 붓”을 얻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간다. 시를 읽는 우리들로서는 참으로 부럽고도 무섭지 않은가!
무릇 시인이란, 그렇게 자신이 돌멩이가 되고, 또 자신의 발바닥으로 그 돌멩이에 날개를 달고, 마침내 그 날개가 자신의 붓이 되는 존재들이다. 아니다. 시인은 돌멩이를 하늘로 날릴 날개를 자신의 몸으로 만드는 존재들이다. 아니다. 시인은 굳어있는 모든 것을 새롭게 꿈꾼다. 아니다. 시인은 걷는다.

글_ 김용필 북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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