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영희 칼럼

대북 식량지원이 급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백발의 교수는/하루같이 교단에서/출석부를 펼쳤다/부르튼 입술로/학생들을 호명했다/대답이 없을 때마다/자신의 가슴에 구멍 뚫린 듯/굶어도 배워야 한다고/애타게 호소하던 백발의 교수/그러던 교수가/오늘은 제자리를 비웠다/인격의 높이/지성의 높이/스승의 높이로/학생들이 쳐다보던 교탁 위엔/고인의 초상화만 있었다….

‘출석부’라는 제목의 이 시는 탈북시인 장진성(36)이 지난 16일 북한 인권단체인 ‘좋은 벗들’(이사장 법륜 스님)이 주관한 새터민 기자회견에서 낭독한 것이다. 기자회견은 정부에 20만t의 대북 긴급 식량지원을 호소하는 자리였다. 남한 사회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된다 안 된다로 발칵 뒤집힌 지금 북한 사회에서는 옥수수죽 한 사발을 못 먹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 ‘좋은 벗들’이 추적한 아사의 진행 과정은 지옥으로 가는 계단 같다. 쌀밥→옥수수+쌀밥→옥수수밥 세 끼→옥수수밥 두 끼→옥수수죽→풀죽→묵지가루죽→벼 뿌리 말려서 간 죽→소나무껍질 죽. 북한은 지난 5월 묵지가루죽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 ‘좋은 벗들’의 판단이다. 옥수수껍질로 만드는 묵지가루죽에서 벼 뿌리 죽으로 넘어가면서 소화불량과 장파열, 배변불량과 영양고갈로 아사자가 생기기 시작한다.

한때 좋아졌다던 북한의 식량 사정이 왜 이렇게 나빠졌는가. 2006년 7월과 2007년 8월 북한의 곡창지대인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도를 홍수가 휩쓴 것이 국내적인 원인이다. 국제식량가격이 2~3배로 급등하고, 중국이 올 초부터 올림픽 준비와 국제식량가격 급등에 대한 대응으로 식량 수출을 통제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이 끊긴 것이 국제적인 원인이다.

실제로 아사자가 나고 있는가. ‘좋은 벗들’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황해남북도에서만 하루에 한 이(里)·동(洞)에서 2~3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이것이 전국 4500개 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좋은 벗들’의 정보는 믿을 만한가. 농촌지역의 시장·보건·의료·학교·농사·교통 같은 민중정보에서는 정부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정치·군사·전략에 관련된 정보에는 강하지만 민중정보에서는 관심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지금 재앙 수준의 식량난을 맞은 것이 사실인 이상 한 이·동의 아사자가 1명인가 2명인가 3명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반의 반의 반으로 줄여서 계산해도 하루에 북한 전역에서 세 자릿수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

역시 법륜 스님이 운영하는 JTS(Join Together Society)는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민간단체다. JTS는 이것저것 정치적 조건 달지 말고 20만t의 식량을 긴급 지원하라고 정부에 촉구한다. 20만t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2개월치 식량인 60만t의 3분의 1인데 비핵화의 진전 상황과 북·미, 북·일 관계 개선의 속도로 봐서 그걸로 두 달만 버티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들어가 1990년대 같은 참혹한 기아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북한 주민들이 옥수수죽·풀죽 한 그릇을 못 먹어 죽어가는데 북한 당국이 먼저 요청해야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한가하고 비인도적이다. 북한 인권을 말들 하지만 생존권에 앞선 인권은 없다. 정부의 대북정책은 안개 속처럼 희미하다. 그나마 한국판 네오콘(신보수파)이 아닌가 의심되는 사람들이 미국의 부시 정부가 2006년 말까지 6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대북지원을 핵문제와 남북대화에 연계하는 정책을 선호한다. 6·15 공동선언과 10·4 합의를 없었던 걸로 하려는 언행, 얻는 것 없이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한다.

그러면서 통미봉남(通美封南)을 걱정한다. 굶어 죽는 동족을 살리는 최소한의 인도적 식량지원은 한 생명이라도 더 꺼지기 전에 정치적 조건 없이 서둘러 실행에 옮겨야 하지 않는가.

핵문제의 진전에 따라 미국도 내년 6월까지 북한에 50만t의 식량을 지원하기로 하고 7월까지는 통밀과 옥수수를 합쳐 6만여t을 보낸다. 북한 당국의 남한 비방과 버티기 전략은 개탄스럽고 기아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러나 죽어가는 동족을 살리는 식량지원만은 정민(政民)분리로 가야 한다. 신앙심 깊은 대통령과 통일부 장관은 신약성서 로마서(12:20)의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고 북한 긴급 지원에 결단을 내릴 것을 기대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