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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단편소설 당선작-알람시계들이 있는 사막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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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그들이 바닥에 새우 삶은 물을 뿌리든,모시조개탕에 붉은 포도주를 쏟아 붓든,해파리 푸딩 위에 후추 알갱이들을 장식으로 올리든 정 사장은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
민구는 「등대」라는 작은 사진에 정신을 쏟고 있다.그 사진은유리 수족관 바닥에 깔아 놓은 모래 속에 왼쪽 귀퉁이를 얕게 뿌리박고 서 있다.그는 일곱 달쯤 전의 이른 봄에 등대를 보러어청도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 여행길에 만났던,이름이 지연이었던가 지은이었던 어느 여자는 목 언저리까지 늘어진 붉은기 도는 갈색 파마머리와 어린애같은 얼굴에 다닥다닥 붙은 자잘한 주근깨들을 가지고 있었다.그녀가 쥐고 있던 사진을 그에게 주었을 때,그는 초라 한 그 「등대」속에서 무엇이든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이건 제목일 뿐이야.그녀는 화난 눈으로 깔깔 웃었다.
화장실 바로 앞에 놓인 테이블에 남정인이 앉아 있다.그녀 역시 할로겐등들의 집중 조명을 받는 수족관을 본다.손가락만한 물고기 한마리가 그녀의 테이블 위에 놓인 투명한 비닐 팩 안에서떠돈다.그녀는 쉰 살이 넘었지만 마흔예닐곱 살 정도로 보인다.
담배를 서너 갑 사들고 화요일마다 「사막과 바다」에 들러 마르가리타를 주문하는 정인은 「행복한 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그녀는 몸이 바짝 말라서 성질이 꽤 까탈스럽게 보이지만 아무리 형편없는 음식이 나와도 매번 깨 끗하게 먹어 치운다.「툭눈이 붕어」와 「탕」아줌마는 그녀가 지나치게 자주 화장실에 들락거린다는 점 때문에 늘 기분이 개운하지 않다.남정인은 「사막과바다의 중독자」들 중에서 가장 늙은 여자다.
『오늘 것은 아까운데요.』 민구가 남정인의 테이블 위에 있는물고기를 가리킨다.투명한 비닐 팩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작은 새처럼 허공에 뜬 듯이 보인다.통통하게 살진 그 물고기는 「행복한 시간」동안 마른 모래 위에 던져질 운명이다.「물고기라!」 그 는 물고기들을 잠시 부러워한다.먹이의 움직임이나적의 다가옴,장애물의 정확한 위치,동료들과 떼지어 몰려다닐 때유지해야 할 적당한 거리 따위를 귀신같이 안다는 그 놈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나지 않고 맛볼 수 없고 감촉할 수없는 대상물들까지 천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깝다구요,오늘 것은.』 그가 서너 번 더 크게 외친 뒤에야 정인은 물고 있던 담배를 얇고 긴 입술 사이에서 마지못해 빼낸다.여름부터 줄곧 그녀는 카페를 하나 개업해볼까 생각하던 중이다.결심이 서는 대로 그녀는 정 사장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할 계획이다.그 녀는 「화려한 인생」이라든지,「늘 푸른 낙원」등의 이름들까지 벌써 여럿 생각해 두었다.
『매번 아까운 놈들이었잖아.그런 빈말은 치우고 저 사진이나 당장 모래 속에 파묻으라니까.묻기 싫으면 버리면 되고.어쨌든 저건.』정인이 수족관 안의 작은 사진을 턱짓한다.『웃겨.』 박지연! 민구는 그 군산 여자의 이름을 「지연(遲延)」으로 정한다.누구의 첫 눈에라도 그때의 그녀는 끝장에 가서는 기어이 바다에 뛰어들려고 모질게 마음먹은 사람으로 보였음이 틀림없었다.
오늘의 「행복한 시간」에 마른 모래 위에서 시 들어 죽어갈 저불행한 물고기 놈처럼 그 여자도 이루 말할 나위 없이 아깝게 보였다고 그는 생각한다.그녀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민구는양복의 안주머니를 뒤적여 회중시계를 꺼낸 뒤 천천히 그 태엽을감기 시작한다.
『하긴 저 사진이 없어지고 나면 손님들이 지금보다 더 적어질지도 몰라.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재수 없는 부적같애.그 여자는 저런 걸 낯선 여행객한테,그것도 정사장같이 성질이 꺽꺽한사람한테 왜 줬을까.사고 팔 만 하거나 줄 만하 거나 간직할 만한 가치가 통 없다구.또 왜 저걸 몇 달동안 수족관 안에 줄곧 넣어 두고 있는 거야,정사장은?』 『그러고 싶을 때가 있죠.』 『가끔씩은 그러고 싶기도 할까?』 『아무때든 그러고 싶을수 있어요.』 『아무때? 아무때든?』 를 가두고 있는 투명한 비닐 팩이 정인의 손등에 부딪혀 테이블 위에서 핑그르르 두어 바퀴 돈다.그 팩 속의 물고기가 움직인다.정년이 가까운 나이에인도 현장 근무를 자원한 정인의 남편도 그런 말을 했다.언제든그러고 싶었어,언제든.
그럴 만한 이유도 그에게는 없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충고 하나 할까?』 정인은 담배를 입으로 다시 가져가면서 말한다. 『이름이 틀렸어.「사막과 바다」는 카페 간판에도 안 어울리는 이름이야.바꿔야 장사가 된다구.레스토랑은 밥장사잖아.
행복한 시간!어때? 해피 아워야,해피 아워.』 그녀는 늙은 여우처럼 킹킹킹 웃는다.담배 연기가 그녀의 얇고 긴 입술 사이에서 풀풀 쏟아져 나온다.「이런데서 무던하게 견뎌내는 걸 보면 쓸 만은 한 것도 같애.정말 요즘은 부려먹을 만한 사람이 드물다니까.」 그녀는 숫된 손놀림으로 묵묵히 태엽을 감으며 구부정하게 서 있는 민구가 그런대로 마음에 든다.담배 연기를 폐장 속으로 깊숙이 빨아 들이면서 정인은 그를 거듭 눈여겨본다.
태엽 감기를 그만 둔 그는 이제 할로겐등 하나를 잡아 각도를알맞게 틀어서 정인이 포장해 들고 온 물고기를 비춘다.파란 빛을 내는 가느다란 줄무늬가 검보라색 껍질 위로 여러겹 빗겨 내린 날렵한 놈이다.그 물고기는 얇고 투명한 지느 러미를 움직일때마다 백서른두개의 시계 초침들이 뱉어 내놓는 거대한 부피의 소리 덩어리까지 고스란히 끌어 당겼다가 밀어내는 것같다.
그는 처음으로 그 소리를 시끄럽게 느낀다.이렇게 많은 시계들이 얼마 뒤에 일제히 알람을 울려대면 그때부터 과연 행복한 시간일 수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한다.
오늘은 줄담배쟁이 정인이 「사막과 바다」의 유일한 손님이다.
그녀는 어떤 화요일이면 세 갑이나 되는 담배를 앉은 자리에서 종일토록 피워대기도 하고,어떤 화요일이면 역시 세 갑이나 되는담배를 한꺼번에 와르륵 쏟아 늘어놓고 하나씩 그 껍질을 벗겨가며 짙은 갈색 가루들을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아올리기도 한다.민구로서는 그녀가 담배를 부스러뜨리는 날과 피워대는 날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그녀는 어느 때든지 자리를 잡고 앉으면 주저하지 않고 부스러뜨리거나 피워대 거나 한다.
「동통역치(疼痛역値)!」 민구는 정인의 동통역치를 문득 알고싶어진다.「아픔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최소 강도의 자극이라는말이지?」그는 입을 비죽거리며 웃는다.진화의 정도가 낮을수록 동통역치는 높아진다.물고기의 동통역치는 꽤 높다 .그놈들은 낚시바늘에 입을 꿰이거나 작살에 등을 찔리거나 하면 아픔보다는 불편함을 느낀다.「저 늙은 여자는 매번 무얼 저렇게 불편해하는걸까?」그는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아파했는지 기억할 수 없다.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꾸 불편해져 가고만 있다.자신의 동통역치는 물고기보다 더 높을 것이라고,그러니 저 줄무늬 녀석은 자신보다 더 진화해버린 아주 기특한 놈이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한다.민구는 다시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기 시작한다.
이 레스토랑의 네 벽과 천장에까지 닥지닥지 붙여둔 크고 작은사막 사진들을 보러 오는 「사막과 바다의 중독자」들은 꽤 여러명이다.그들은 이 레스토랑에 올 때마다 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건전지들을 날라 온다.맑은 화요일의 「행복한 시간」이면,수족이라곤 씨알이 말라붙은 텅 빈 유리관에 넣어 주겠다면서 기어이 물고기를 가지고 오는 「괴물」들이 전체 손님의 반수나 된다.
그들 덕분으로 수족관 안의 바삭바삭하고 따스한 모래 위에서는우습게도 「행복한 시간」마다 일고여덟 마리에 이르는 불행한 물고기들이 할로겐등들의 뜨듯한 열기에 데워지면서 팍팍하게 시들어가야 했다.해안 사막을 어슬렁거리던 사자들이 죽어 떠밀려온 돌고래를 찾아내면,그 입 속에 머리를 처박고 내장을 뜯어먹는다는거야.내륙 사막엔 코끼리 떼까지 산다지만 사자라니,믿어져? 「괴물」들은 물고기들이 마른 모래 위에서 대단히 불편해하다가 뻣뻣해지는 갖은 모습들을 끝까지 구경하면서 지껄여대곤 한다.한류때문에 안개가 많이 끼고 습도도 높다니까.그 해골들,어쩌면 사막이 아니라 그 사자들한테 먼저 먹혔던 건지도 모르지.떠밀려온돌고래들처럼.사자를 잡아먹은 뱃사람들이라도 결국은 사막에 먹혔을 거구.
민구는 알람 시계 하나 혹은 둘이나 셋만큼 값이 나가는 아까운 물고기들이 순식간에 뻣뻣해져 갈 때마다 자신의 알람 시계들키우기에 더욱 집착해 왔다.『그놈들은 눈을 뜨고 죽는다,그놈들에게는 눈꺼풀이 없다.』아래에서 위로 눈꺼풀을 덮어 올리는 상어를 떠올리고 그는 갑자기 불쾌해진다.
민구는 현재 도망중이다.큰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다.없애지않고 자꾸 늘려서 사방에 가득 채워버리면 없는 것 같이 대할 수 있다.끝장에 가서는 마침내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던 지연에게민구는 그런 말들을 했다.그녀는 갑판에 기대어 어두운 빛의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산의 어느 여관에서 일한다던 그녀는 이른 봄인데도 하늘거리는 얇은 원피스와 차양이 넓은 해변용 모자를 쓰고 있었다.그녀는 키가 약간 컸고,조금 못생겼고,꽤 어려 보이지만 사실은 제법 나이든 여자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종류 의 흔해빠진여자였다.그들은 군산항의 선착장에서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그때도 민구는 도망중이었다.『또 그 여자는 도대체 무엇에 대해 그렇게 불편해 했던 걸까.』 회중시계의 태엽 감기는 속도가 느려진다. 담배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고 있지 않았다.그녀는 혼자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마냥 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온 몸이 현재 닫혀져 있음을 남들에게 충분히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무언가에 몰두해 있느라고 소리 따위는 잘 들을 수 없는 사람처럼 구는 일이 그녀에게는 중요하다.그녀는 쉬지않고 연기를뿜어내면서 쓸모없는 사진들이나 탐내는 늙은 여자로 자신을 제법그럴듯하게 위장했다고 믿는다.사실 정인은 「사막과 바다」의 시계 소리들을 즐기는 중이다.그 소리들은 시간이 다가오고 머무르고 지나가는,보이지 않는 그 움직임들을 그녀의 몸위에 새겨 놓는다.민구의 눈에 정인은 마치 젊은 사막처럼 보인다.그녀처럼 과격한 늙은 여자를 그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다.『생각이나 근심이 너무 많아도 어떤 일에 나 대책없고 무모할 수 있지.위험할 정도야,저 늙은 여자는.』그는 정인이 그 어떤 일에 무모한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빗방울이 떨어지는데요.』 『사장님,비가 옵니다.비예요,제길.』 「탕」아줌마와 성수가 호두색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그 유리벽에 나란히 얼굴을 댄채 밖을 내다본다.툭탁거리는 백서른 두 개의 알람 시계 소리들에 묻혀서 어스레한 밖의 비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사막과 바다」에 갇혀 있던 다른 네 개의눈들도 유리벽 너머로 당황한 시선들을 급히 돌린다.백서른 두개의 알람 시계들이 5시 49분을 가리키고들 있다.『제기,제길,제기랄,제길할….』민구는 성수의 말끝을 받아 씹는다.사막으로 달아난 그 미치광이 사장이 끝내 안 돌아올 는지 모른다고 그는생각한다.휘움하던 등을 한층 휘어 회중시계에 코를 박듯이 하고민구는 그 태엽을 꾸역꾸역 감는다.
『비 오는 날은 해피 아워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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