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해결 이후 미래를 사자” 외국인 나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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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오라스콤 그룹의 투자로 현대화 중인 북한 평양시 상원군의 상원시멘트 공장 전경. 이 그룹은 지난해 2월 상원시멘트, 이동통신 사업에 투자하기로 박봉주 당시 북한 총리와 합의했다. [화보 조선 2007년 2월호]

2006년에 이어 만 2년 만에 다시 찾은 평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변화는 공항버스였다. 2년 전엔 일반 시내버스를 공항버스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바닥이 낮은 ‘진짜’ 공항버스였다. KKG라는 로고도 선명했다. 북한 측 관계자는 “금강경제개발총회사가 지난 연초에 공항버스 두 대를 기증했다”고 말했다. 중국계 합작 회사인 금강경제개발총회사의 영문명 약칭이 KKG다.

호텔이나 식당에서 외국인들이 북한 사람들과 상담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폴크스바겐과 BMW7 시리즈 등 외제차도 꽤 늘어난 듯했다. 함께 방북한 정창현 국민대 교수는 “상당한 액수의 외자가 북한에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늘어나고 있는 외자=북한에 진출한 외국 기업 중에는 이집트에서 호텔과 건설, 알제리 등 북부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통신업을 하고 있는 거대기업 오라스콤(OCI)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OCI는 1989년 이후 공사가 중단돼 방치돼온 103층 유경호텔 재공사 외에도 지난해 7월 평양의 상원시멘트 공장에 1억5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 대가로 OCI는 상원 공장의 지분 50%를 취득했다. 대신 상원 공장은 이 돈으로 설비를 현대화하고 생산 능력을 확충하는 데 쓰고 있다. 올 1월에는 OCI의 자회사인 오라스콤 텔레콤이 북한의 제3세대 이동통신 사업권을 땄다. 광대역 부호분할다중접속(WCDMA) 방식이다. 향후 3년간 4억 달러를 인프라 구축에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사업권 유효기간은 25년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 하반기에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KKG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통일거리 인근 대동강변을 대규모 오피스 및 상점, 음식점 타운으로 조성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공사에는 50층짜리 쌍둥이 빌딩 건립 계획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평양화력과 북창화력에 발전기를 지원한다는 얘기도 있다.

세계적인 거대기업들도 대북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한 북한 전문가는 “외국 기업과 대사관에서 북한의 시장성에 대해 물어보는 일이 많아졌다”며 이같이 밝혔다. 특히 세계 최대의 철도차량 메이커인 캐나다의 봄바르디아와 세계 건설중장비업계의 선두기업인 일본 고마츠 등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인프라 구축과 설비 개·보수에서 큰 시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지에서 만난 한 독일 기업인도 “수력발전소에서 일하는데 사업 기회가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왔다”고 밝혔다.

외자 증가는 통계 수치에서도 확인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통계에 따르면 2003년을 기점으로 크게 늘었다. 직전 5년간 북한이 유치한 외자는 연평균 100만 달러 남짓이었지만 2003년부터는 연평균 1억 달러를 훌쩍 넘었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가 완화될 것이 확실해지면 가시적이고 놀랄 만한 성과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투자 국가도 다양해져=외자 도입선도 다양해지고 있다. 북한에 투자한 외자 가운데 아직은 중국 자본이 압도적이다. 그런 가운데 이탈리아와 싱가포르, 홍콩, 이집트 등 다른 나라들의 투자도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 건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중동 국가의 진출이 활발하다. OCI가 대표적이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도 적극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쿠웨이트는 북한의 하수도 개발사업에 2000만 달러를 차관 형태로 투자했다. 6월 중순에는 쿠웨이트 재무장관도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북측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중동 국가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홍익표 전문연구원은 “중국 기업은 자원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중동과 유럽 등은 북한의 도시 인프라와 통신, 금융 등에 투자하는 게 차이점”이라고 설명했다.

◇아직은 외자 유치 초보 단계=북한은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 데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인 자세로 변했다. 2006년 외국인투자법을 개정해 합영·합자 기업의 외국인 지분을 최대 85%까지 인정하고 있다. 홍 연구원은 “북한은 2000년대 들어 대외경제를 자주경제의 보조 수단에서 경제발전의 디딤돌로 인식을 바꿨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베트남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여전히 크게 미흡하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이 2006년 유치한 외자가 23억 달러였다. 북한의 20배에 달한다. 북한이 변했다지만 아직도 자력갱생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서다. 자원 개발과 관련한 외자 유치를 꺼리는 탓도 있다. 외국계 기업들은 북한의 자원 개발 독점권을 염두에 두고 투자를 생각하고 있지만 북한은 독점권과 관련한 명확한 정책을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북한의 외자 증가는 우리에게 고민거리가 될 수도 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4일 정상회담 이후 한국의 대규모 투자를 기대했지만 물거품으로 끝났다고 비판한다. 남북 경색 국면이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 문제가 해결돼 대북 투자가 급증할 경우 ‘선점 효과’를 상실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강영진·김영욱·채병건·정용수·이철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동영상=이병구 기자, 자문위원=조동호 이화여대교수,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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