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북한얘기 좀 합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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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문제에 침묵하던 대통령이 오랜만에 강한 톤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북한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현재의 북한은 「고장난 비행기」와 같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식량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지난 여름 홍수피해로 올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춥고 배고프게 지낼 것이라는데 이견은 없다.미국.일본의 정보기관과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의 방북결과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문제는 북한실정에 대한 동일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취하고 있는 입장이 다르다는데 있다.우리정부는 지난 베이징(北京) 쌀회담이 결렬된 후 대북(對北)관계 개선에 더 이상 주력할 명분을 잃었다.국내에서 터져나온 비자금사건과 뒤이은 5.18처리문제등 과거청산에 연일 북적이다 보니 북한얘기를 심각하게하는 것조차 정신나간 소리로 여겨질 정도가 돼버렸다.
현재의 북한지도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남쪽의 대통령이좌파(左派)로 몰리고,가뜩이나 보수성향 유권자들을 포용해야 할처지에 놓인 대통령이 북한의 식량난을 빤히 보면서 어떠한 조치도 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으리라.올해 내내 식량난 해소를 위해 구걸외교를 벌여온 북한은 그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확인했다.홍수피해 복구를 위해 WFP와 국제구호단체들이대북한 지원책을 모색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정부가 나서 이를 저지하는 행태를 보면서 분노와 함 께 무력감에 빠져 있을 것이다.결국 북한이 갖고 있는 군사력 시위가 국제적 지원을 유도하기위해 북한이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결론을 내렸을지 모른다.이는 지난날 핵카드를 활용하면서 「서울 불바다」운운했던 결과 난국 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경험을 통해 확인했던 수단이기도 하다.
판문점 가까이 공격적 군사력을 배치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태는 굶주린 인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내부결속을 다지는 북한판국력결집의 전형(典型)이다.북한군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일은 안위(安危 )를 위해 당연한 조치다.미국의 정보기관과 주한미군의 경계태세도 어느 때보다 기민하다.현 상황에서 미국도 일종의 무력감에 빠져있다.만의하나 무력도발사태에 대비하면서도 북한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뾰족한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 문이다.현지 미국외교관의 말마따나 운명에 맡기고 예기치 않은 일에 대비하는 수밖에 묘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정부가 국제구호단체인 국제선명회(월드비전)에 답지한 대북한 지원품의 북한전달을 막고 일본정부에 대북 쌀지원의 속도조정을 요청하는 마당에 일본이 나서 북한을 걱정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몇차례 북한에 골탕먹은 분풀이로 이 기회에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 한국지도자의 결연한 의지 앞에 우방국들은숨죽이고 있다.과거청산 앞에 단호한 칼을 빼든 「무서운」한국지도층을 경원시하고 있는 분위기다.그러나 밖에서 보기엔 다를 바없는 같은 민족에 대해 제3자가 인도적 지원 좀 하겠다는데 가로막고 나서는 우리를 국제사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주변 우방국들조차 우리정부의 논리에 선뜻 동조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정부는 아니라고 펄쩍 뛰겠지만 대북한 포위정책의 결과를 우려하는 주변국의 목소리가 간단없이 터져나온다.
미국의 페리국방장관은 북한을 구조해야 한다고 공언 했고,일본 자민당의 가토간사장도 모종의 긴급조치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지도부의 머리속을 헤아릴 길 없다.그러나 북한이 홍수피해지역을 고립시켜 다른 지역에의 파급을 막으려는 「킬링필드식」선택을 하든지,혹은 무력도발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하든지 그 어느 선택도 우리에게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다.우리 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국제기구의 활동을 지켜보며 침묵하는 것이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본사 전문위원.政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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