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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끝내자는 각료들에 "피도 눈물도 없나" 격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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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72시간 연속 촛불집회’ 사흘째인 7일 서울시청 광장 미국소 모형 앞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5만 명(경찰 추산)이 참가했다. ‘72시간 시위’는 8일 오후 7시 끝난다. 최정동 기자

“그때(노무현 정부) 처리했으면 이런 말썽이 안 났지.” 이명박 대통령이 7일 청와대에서 기독교 지도자들과 오찬 간담회를 하면서 한 말이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쇠고기 시위와 관련해 “일은 그때 다 벌여 놓은 것”이라고 말하자 아쉬움을 표명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에 합의한 이후 한국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쇠고기 문제를 전격적으로 푼 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의회로부터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 대한 추동력을 얻으려 했던 이명박 정부는 ‘졸속 협상’으로 국민의 마음을 잃고, FTA 비준조차 불투명하게 돼 버린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한·미 양국은 쇠고기 이슈가 반미(反美) 시위로 증폭될까 봐 걱정하며 정상회담 후속 조치 협의가 아닌, 쇠고기 협상 땜질 처방을 놓고 줄다리기 중이다. 과연 이 대통령의 언급대로 노 대통령 때 처리했으면 말썽이 나지 않았을까. 한국 정부의 쇠고기 협상은 어떻게 시작됐고,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짚어 본다.

노무현 대통령 찾아간 세 명의 각료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열흘 정도 지난 지난해 12월 말.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의 주선으로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청와대를 찾았다. 그 자리엔 권오규 부총리도 있었다. 한 총리가 운을 뗀 뒤 송 장관과 김 본부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참여정부 업적인 FTA 비준을 위해 쇠고기 문제를 임기 전에 풀도록 결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쇠고기 문제를 풀어 2월 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을 처리하고, 미국도 7월 전에 의회에서 통과하도록 하자는 로드맵을 설명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반응은 격했다.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 내가 만신창이가 돼 있는데, 여기서 더 밟고 간다는 건가. 당신들은 관료지만 나는 정치인이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노 대통령의 언급은 대선에서 참패한 뒤 4월 총선까지 그르칠 수 없다는 의미로 들렸다”고 참석자의 말을 빌려 전했다. 노 대통령은 “내 임기 중엔 안 한다. 다시는 얘기하지 마라”고 했다. 송 장관과 김 본부장이 외교통상부 청사로 돌아온 뒤에도 두 사람의 얼굴은 한동안 붉은 기가 돌았다고 한다. 한 총리, 송 장관, 그리고 김 본부장은 2월 초 노 대통령에게 다시 이 문제를 꺼냈지만 노 대통령의 대답은 단호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30개월 미만이냐, 아니냐는 쇠고기 협상에서 중요한 포인트였다. FTA를 합의하면서 미국 측과 국제기준, 즉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으로 수용하겠다는 의향을 밝혔지만 진전이 없었고, 특히 대선을 전후해 큰집(청와대)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대통령직 인수위가 참여정부 5년을 폄하하는 언급을 자주 한 데 따른 불편한 심기도 한몫한 것 같다”면서 “그래서 당시 이명박 당선자가 직접 노 대통령을 찾아가 이 문제를 협의했다”고 전했다. 이 당선자는 12월 28일과 2월 18일 두 차례 노무현 대통령을 찾았다. 하지만 FTA 비준 문제를 노 대통령 임기 내 처리한다는 데 공감한다는 원칙적인 합의는 있었지만 쇠고기 문제는 노 대통령이 거부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 두 차례 약속

노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쇠고기 문제 해결을 직접 약속한 것은 두 번이다. 한·미 FTA 최종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던 지난해 3월 29일. 노 대통령은 중동 순방에서 귀국하는 길에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흘 뒤 FTA는 타결됐고 이날 노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저는 부시 대통령과 전화에서 쇠고기 수입위생 검역조건 협상에서 OIE의 권고를 존중하며 합리적인 수준으로 개방할 의향이 있다는 점, 그리고 합의에 따르는 절차를 합리적인 기간 안에 마무리할 것이란 점을 약속으로 확인해 주었다”고 했다.

이후 한 달 뒤인 5월 27일 OIE가 미국을 광우병 위험 통제국으로 발표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와 박홍수 농림부 장관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9월 중 수입위생조건 개정이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진전은 없었다. 9월 초 호주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재차 해결을 약속했다. 우리 정부는 미 측에 OIE 기준 존중과 함께 미국과 일본·중국·대만의 협상 시기·내용에 보조를 맞출 것이라는 입장도 전했다.

MB, 한·미 FTA가 최우선순위

2월 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다. 대선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는 상반기 중 4강 외교를 마무리한다는 계획 아래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미국을 너무 빨리 방문하는 것이 친미 사대주의로 비칠 수 있다는 이 대통령의 우려는 조기 방문론 속에 묻혔다. 방미 핵심에는 FTA가 있었다. 정부 당국자는 “사실 ‘21세기 전략동맹’ 관계설정, 한·미 동맹 복원 등은 외교적 수사에 그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새 정부 입장에서 손에 잡히는 성과는 FTA였다”고 말했다. 8억 달러(쇠고기 수입 규모)짜리를 넘어서 수백억 달러 가치를 지닌 FTA를 통해 향후 5년의 경제성장 동력으로 삼는다는 것이 최고 지도부의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 장벽으로 쇠고기 문제가 있었다.

미국은 쇠고기 업체의 로비로 사실상 FTA와 쇠고기 개방 문제를 연계했다. 지난해 3월 FTA 타결 직전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전화통화 내용도 그런 맥락이었다. 패트릭 보일 미 식육협회장 등은 FTA 회담장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의회 비준의 칼자루를 쥔 몬태나 출신의 맥스 보커스 상원 재무위원장은 2007 5월 미국이 OIE로부터 광우병 위험통제국 지위를 부여받은 즉시 한국 측에 쇠고기 시장을 완전 개방하지 않으면 FTA 합의문을 상원에 상정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서 미 측이 “스테이크를 준비했다”고 하자 “이왕이면 몬태나산 쇠고기로 하자”고 한 것은 보커스 상원의원을 의식한 의도적 농담이었다.

잘못 예측된 타임 테이블

미 행정부는 의회 설득을 이유로 동물성 사료 금지 조치 이행단계가 아닌, 공포 시점부터 모든 연령의 쇠고기 수입을 요구했다. 농림수산식품부(당시 농림부)는 인수위에 이 같은 미국의 기류와 정부가 설정한 단계별 개방 방안을 보고했다. 1단계로 30개월 미만의 뼈 있는 고기를 개방하되 미국이 사료 강화 조치를 이행(통상 1년 정도 소요)하는 시점에서 30개월 이상도 수입하는 방안을 보고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 내에는 “야당도 5월 임시국회에서 비준안 동의를 할 수 있다고 한다”는 낙관론이 일부 인사에 의해 강하게 제기됐다. 한 소식통은 “쇠고기 협상을 어떻게든 끝내 한·미 정상회담의 FTA 이슈에 힘을 싣자는 의견이 이런 논리에서 나왔다”고 했다. 워싱턴 주미대사관도 미 측의 FTA 비준을 낙관적으로 보는 전문을 보내왔다고 한다.

정상회담 전 타결이란 시한이 설정된 것이다. 이 소식통은 “당초 OIE 기준에 따라 쇠고기를 수입하더라도 단계별 개방 선에서 수용하려 했으나, 전면 개방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곽노성 교수는 “시한에 쫓기는 당사자는 협상에서 반드시 많은 양보를 하게 되고 자신의 중요한 의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한 채 실패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도 4월 9일 총선에서의 정치적 부담을 의식해 미국과 쇠고기 협상을 시작하지 않았다. 총선 직후인 11일 협상이 시작돼 일주일 만에 타결됐다. 시한에 쫓겼다는 사실은 우리 측 수석대표인 민동석 농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이 지난달 초 손학규 대표를 만나 밝힌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공개된 녹취록에는 “이게(정상회담 하루 전 협상 종료) 의심을 받으니까 나는 정상회담 전까지 협상 못 끝내겠다. 일부러라도 더해 가지고…”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우리 정부 협상단은 미국의 동물성 사료 금지 조치가 2005년 입법예고안보다 후퇴했는데도 이를 잘못 번역해 강화됐다고 설명하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안덕근 교수는 “여기에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부처 통폐합과 인사 이동으로 경험자가 대거 빠진 우리 정부 대표단과의 협상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노 마크 찬스’였다”고 말했다.

‘먹거리’ 정서 무시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OIE로부터 광우병 위험 통제국의 지위를 획득한 이후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인도네시아 등과 OIE 기준에 따른 검역조건으로 협상을 체결하고, 우리가 보폭을 맞추는 나라인 대만도 우리와 비슷한 시점에 거의 합의에 이른 점을 감안해 협상을 서둘러 타결한 측면도 있다”면서 “하지만 우리 국민의 정서적 반감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안덕근 교수는 “지난해 한·미 FTA가 타결될 즈음 일본 정부 인사가 ‘쇠고기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우리는 쇠고기 때문에 미·일 FTA가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쇠고기가 갖는 상징성과 정서적 측면을 너무 간과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협상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4월 18일 농식품부는 “사료금지 조치가 공포된 다음에 30개월 이상 소를 수입하기 때문에 강화된 조치하에 단계적으로 수입하기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흘 만에 민동석 농식품부 차관보는 “미국이 연방관보에 사료 조치를 공포하겠다고 통보했다”면서 월령 구분 없이 수입된다고 말을 바꿨다.

쇠고기 협상에 대한 여론이 악화일로를 치닫자 정부는 미국과 수차례 추가 협의를 했다. 현재는 월령 30개월 이상 소가 수입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재협상은 아니지만 내용적으론 합의 번복이다. 한·미 간 협의가 계속되는 사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의 발언이 외교적 논란을 빚기도 했다. 급기야 7일 이명박 대통령은 부시 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쇠고기 문제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기에 이르렀다.

김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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