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가는길>경남 양산군 축서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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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암자도 주인이 하는 일을 닮는가.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축서암(鷲棲庵)은 그대로 거대한 화실 같은 느낌이다.뜨락에는 모과와 목련,파초와 옥잠화,석류와 감나무가 그림의 배경인 듯 자리잡고 있고 암자 주위엔 잘 생긴 소나무들이 울타 리처럼 서 있다. 수안(殊眼)스님에게는 그림 그리는 것이 곧 수행이다.그림으로 자비를 이웃에 전달하겠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스님의 선화(禪畵)는 외국에서 더 호평을 받고 있다.프랑스 상원의장 초청으로 룩상부르궁 의장공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국내 화가 들을 놀라게 했고 모로코나 독일 등지에서도 그의 수행력을 그림으로 펼쳐 보였던 것이다.최근에는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UNICEF)에서 발행하는 엽서에 그의 작품이 인쇄돼 세계 각국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도 기억할 만한 일이다.그런데 그 는 어디까지나 스님이다.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느새 그는 화가에서 수행자가 돼 버린다.
『허공에 있소.점을 찍어 두었지.』 그런가 하면 또 음유시인이 돼 시를 낭송한다.축서암이 어떤 곳이냐고 묻자 『태풍의 눈과 같은 곳,콧물이 날만큼 서러운 곳』이라고 시인의 감성으로 대답하는 것이다.스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태풍의 눈과 같은 기(氣)를 느낄 때는 붓을 단숨에 휘둘러 그림을 그리고,콧물이 날만큼 서러울 때는 시(詩)를 읊조리는 것은 아닐는지.
뜨락의 옥잠화는 벌써 꽃이 져버린 모습이지만 스님의 시 『옥잠화』중 한구절은 아직도 필자의 뇌리에 아낙의 은비녀처럼 또렷하다.「내 사랑하는 아낙네/오랜 전생부터/꽃 가꾸는 정성이 대단하더니/죽음이란 아름다운 영혼을 안고/꽃뱀처럼 세번의 생을 살았다」.
스님이 그림을 숨겨두었다는 허공을 바라본다.햇살이 한가득 차있어 양명하다.햇살이 이러하니 어찌 모과가 향기를 퍼뜨리지 않을 것인가.또한 나그네라고는 하지만 어찌 석류가 아프게 벌어지는 황홀한 자해(自害)에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이윽고 암자를 내려서려 하는데 성악가인 테너 시명(是名)스님이 물 한모금 마시고 가라 한다.과연 돌우물에서 퐁퐁 솟는 물맛이 좋다.축서암의 물김치나 직접 쑨 메주가 왜 불자들 사이에인기가 있는지 알 것만 같다.돌우물의 물맛에 그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닐까.통도사 산문을 들어서지 말고 서리 마을을 지나 지산리 양지농원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암자에 다다른다.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축서암 (0523)82-7080).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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