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 운동 한복판엔 최첨단 뉴미디어가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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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08면

쇠고기 시위 현장은 새벽에도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된다. 시위 참가자들은 인터넷 게시판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정보를 교환한다. 이번 시위가 ‘디지털 시위’로 불리는 이유다. 그런데 서강대 손호철(정치외교학) 교수는 “새로운 매체를 이용하는 것이 특별히 이번 시위에서만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손 교수의 말처럼 저항 운동에 그 당시의 뉴미디어가 활용된 사례가 많다.

1979년 이란 ‘카세트 혁명’에서 촛불시위 인터넷 생중계까지

이란 혁명은 ‘카세트 혁명’이라고 불린다.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가 반정부 연설이 담긴 자신의 카세트 테이프를 이란으로 보내 국민을 선동했기 때문이다. 문맹률 75%에 호메이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던 이란 국민에게 카세트테이프는 효과적인 매체였다. 1979년 2월, 호메이니는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란으로 돌아온다.
우리나라의 87년 ‘6월 항쟁’엔 전동 타자기와 복사기가 이용됐다. 철필로 기름종이에 글씨를 새겨 등사판으로 한 장씩 찍어내던 예전의 전단 제작 방식보다 월등히 빠르고 대량 제작이 쉬웠다. 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에선 팩스가 큰 몫을 했다. 대학생들은 팩스로 급변하는 상황을 주고받았고, 해외에도 이를 알려 세계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94년 1월 멕시코 치아파스 지방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은 ‘인터넷 게릴라’로 불린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기 때문이다. 사파티스타는 밀림에 은둔하면서도 인터넷으로 동조자들을 모아 오프라인 집회를 96, 97년 두 차례 개최했다. 세계 40여 개국에서 4000여 명이 참여했다.

98년 5월 인도네시아 사태 때는 무선호출기(삐삐)와 휴대전화로 시위 상황을 주고받고 e-메일이 언론 역할을 하는 ‘첨단 시위’가 화제가 됐다. 2002년 미선·효순 촛불집회,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선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집회를 이끈 동력이었다. 지난해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선 가두 시위 모습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 디지털 카메라와 블로그를 이용해 기자 역할을 한 시민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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