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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S라인 낙하산’…공기업 CEO 장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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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04면

인적 쇄신으로 난국을 돌파하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욕이 무색하다. 한쪽에선 사상 최대의 ‘낙하산’게임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이다. 무대는 물갈이가 한창인 공기업이다. 사장을 뽑는다지만 대통령과 친한 인사나 대선을 도왔던 사람들이 줄줄이 낙점을 받는다. ‘민간인 낙하산’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청와대·내각을 향한 ‘고소영’과 ‘강부자’ 논란이 식기도 전에 새로운 족쇄가 채워지고 있다. 잘못된 공기업 인사는 특히 보수층 민심의 MB정부 이탈을 가속화할 것이란 지적이다.
 
“실적 인사” 반론도

코레일·토공·우리금융 수장에 MB 인맥 내정

지난주 온 국민의 눈이 촛불집회에 쏠려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우리 사회 보수층을 중심으로 ‘S(서울시)라인’ 인맥이 입방아에 올랐다. 이명박 대통령과 서울시청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MB맨들을 말한다. 국토해양부가 산하 공기업의 사장 내정자를 밝혔는데 S라인이 줄줄이 자리를 꿰찼던 것이다. 서울지하철공사 사장을 지낸 강경호씨는 코레일(옛 철도공사) 사장에 내정됐다. 그는 현대양행을 거쳐 한라중공업 대표를 지냈으며 대선 때는 이명박 후보 지지 성향을 가진 경제 전문가 모임인 ‘서울경제포럼’의 공동대표였다.

토지공사 사장으론 이종상 전 서울시 균형발전본부장이 확정됐다. 그는 정부 출범 때 국토해양부 차관 물망에도 올랐었다. 수자원공사 사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이지송 전 현대건설 사장은 청계천 복원공사를 지휘했다.

관가뿐이 아니다. 공기업들이 지분을 가진 보도채널 YTN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언론특보였던 구본홍 고려대 석좌 교수를 최근 사장 후보로 선임했다. 노조는 “시청자들이 이명박 정부를 대변하는 방송처럼 느낀다”며 반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5일 아리랑TV 사장으로 뽑은 정국록 전 진주MBC 사장도 이명박 후보 특보를 지냈다.

최근 금융권에선 민영화를 앞둔 우리금융지주의 회장 선임이 최대 관심사였다. 여러 인물이 거론된 끝에 지난달 말 회장이 내정됐다. 주인공은 이팔성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였다. 그는 대통령의 고려대 2년 후배다. 교우회를 통해 대통령을 포함한 고려대 인사들과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뱅커였던 그는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2005년 여름 서울시향 대표로 옮겼으나, 대통령 취임 이후 금융감독원장·산업은행 총재·증권선물거래소 이사장 같은 굵직한 금융기관의 수장으로 매번 하마평에 올랐다.

낙하산 의혹의 반론으로 등장하는 것은 ‘실력’이다. A은행의 임원은 “이팔성 내정자는 우리금융에서 37년을 있었고, 1990년대 초 한일은행 남대문 지점장일 때 전국의 5000개 은행 지점에서 실적 1위를 달성한 전문가”라고 말했다. 다른 공기업 수장들도 실적이 있다. 코레일의 강경호 내정자는 서울 메트로의 적자를 3년 만에 3000억원가량 줄인 내공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사장 낙점자가 한둘이 아니기에 ‘코드 인사’ 뒷말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에 따라 쇠고기 협상 파문에 곱지 않은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랬지만 결국 ‘공모(公募)의 탈을 쓴 사모(私募) 아니냐’는 비판이다.
 
적임자가 없다?

사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효율적인 공룡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체질을 싹 바꾸겠다”고 공언했을 땐 기대가 컸다. 그런데 민영화는 주춤거리고, 민간인 낙하산 논란만 점점 거세진다. 공모라는 객관적 절차가 존재하는데 왜 ‘낙하산’이란 말이 나올까. ‘측근 인사’와 함께 깔끔하지 못한 공모 과정도 한 몫하고 있다.

4월에 시작돼 아직도 사장을 뽑지 못한 한국주택금융공사가 대표적이다. 총선 출마로 사퇴한 유재한 전 사장의 후임을 뽑기 위해 공사는 22명의 응모자 중에서 최창호 전 주택금융공사 부사장 등 세 명의 후보를 금융위원회에 추천했다. 금융위는 최종 후보를 골라 대통령에게 보고할 참이었다. 그런데 돌연 청와대 인사 라인에서 “마땅한 사람이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모든걸 무효로 하고 재공모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비단 금융권만이 아니다. 지식경제부 산하 공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재연됐다. 4월에 치러진 KOTRA 사장 공모에선 내부 출신의 세 명이 후보로 뽑혔지만 지경부와 청와대의 검증 작업에서 퇴짜를 맞아 재공모에 들어갔다.

한국가스공사의 이수호 사장 사례는 새 정부가 목청 높이는 ‘민간 우대’ 공기업관(觀)의 정의가 뭔지 헷갈리게 만든다. LG상사 부회장 출신인 그는 2005년 11월 민간인으론 처음 가스공사 사장으로 발탁됐다. 23년간 퇴역 군인·관료들이 독점했던 자리였다. 조직 개혁, 해외자원 개발로 업적도 쌓았다. 그러나 정부의 ‘일괄 사표’ 원칙에 따라 물러났다. 지경부 강남훈 대변인은 “본인이 한 번 더 하고 싶다면 공모에 응할 수 있다”며 “기존 사장이건 새로운 도전자건 한데 모아 백지 위에서 능력을 평가한다는 게 새 정부의 공모제 취지”라고 말했다.

‘인사(人事)=망사(亡事)’ 막으려면

공기업 낙하산 논란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5~6공 때엔 군화(군인 출신)가, 김영삼 정부 때엔 등산화(민주산악회)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엔 운동화(운동권)가 공기업 수장을 꿰찬 씁쓸한 역사가 있다. 내각·청와대의 고위 관료에 비해 여론 시선이 덜하고, 정부 말도 잘 듣는 공기업의 사장 자리를 ‘일등 전리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인사가 만사(萬事)라고 외쳤지만 구호에 그쳤던 셈이다.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민간인부터 공무원까지 가리지 않고 출중한 인재를 뽑는다’는 명분으로 99년 공모제가 시작됐고 노무현 정부에서 확대됐다.

한데 ‘선진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새 정부에서도 낙하산 의혹이 여전하니 민심이 흔들린다. “누구 주려고 마음먹고 형식적으로 공모하는 식이면 안 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4월 청와대 확대비서관회의)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투명하지 못한 공모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며 사실상 청와대에서 특정 인물을 찍어 내려 보내고 있다는 불만이 파다하다.

과거 낙하산 수장들의 방만한 경영은 ‘대리인 비용(agency cost)’이라는 비효율을 야기했고 부실로 이어졌다. 새 정부는 공기업 개혁 시나리오로 ‘과거 CEO 청산→새 수장 임명→민영화 착수’라는 수순을 밟고 있지만, 사람 바꾸는 것보다 민영화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이 많다.
권영준(국제경영학부) 경희대 교수는 “공기업 사장 내정자들의 도덕성과 능력 여부를 떠나 마치 전쟁으로 전리품을 얻은 듯한 모습이 끊이지 않는 게 문제”라며 “투표로 정권을 위임받은 만큼 사장추천위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법을 지키는 노력을 보여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사에서도 여론을 읽고 반영하는 ‘승복의 리더십’을 보이라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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