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뛰는 실버] 퇴직 후 일하던 자리 재취업 “수백 가지 장비 지식이 자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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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퇴임 후 근무하던 부서로 재입사한 3명. 왼쪽부터 박길복·안문기·제기용씨. [사진=곽태형 객원기자]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의 경우는 행운이지요. 아무 준비 없이 그냥 퇴직해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일자리를 찾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대우조선해양주식회사(DSME) 선행도장팀의 박길복(59)씨. 지난해 5월 정년퇴직한 박씨는 한 달간 휴식을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퇴직 전에 일했던 바로 그 부서에서, 꼭 같은 도장(塗裝) 일을 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이나 근무 환경은 모두 예전과 같다. 월급만 퇴직 전보다 약간 줄었을 뿐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지요.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집사람입니다. 집에 있지 말고 어디든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가서 돈까지 벌어오니 금상첨화지 뭡니까.”

박씨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대우조선해양의 정년 후 재입사 제도 덕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정년이 일률적으로 58세다. 정년 연장은 이 회사 노사 협상에서 매년 등장하는 단골 메뉴였다. 지난해 1월 노사는 전향적인 타협점을 찾았다. 정년 연장 대신 본인이 희망하고, 희망하는 부서에 일자리가 있을 때 다시 입사하는 정년 후 재입사 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 제도는 근로자가 퇴직 후 한 달 가량 집에서 휴식 시간을 보내고, 회사와 1년 단위의 재고용 계약을 체결한다. 60세까지 재고용이 가능하며 재입사한 사람의 직급은 촉탁직이다. 임금은 퇴직 전 임금의 63~70% 수준. 개개인의 계약조건에 따라 8단계의 임금 테이블을 적용받는다. 최고 연봉은 4000만원이며 단순 간접업무는 연 2000만원 정도 받는다.

이 제도에 따라 재입사해 일을 하는 사원은 현재 170명이다. 인사팀 이정춘 과장은 “올해 100여 명을 재입사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과장은 “제도를 도입할 당시 국내 기업 가운데 벤치마킹할 기업이나 모델이 없어 일본까지 출장을 가는 등 대책 마련을 위해 상당히 고심했으나 제도 시행 후 반응이 좋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직 정년퇴직자 모두를 재고용할 형편은 안 된다.

상암 월드컵경기장을 9개 펼친 것만 한 제1도크와 육상 도크를 오가며 각종 장비의 정비와 운전을 맡고 있는 제기용(59)씨도 지난해 6월에 정년퇴직한 뒤 7월에 재고용됐다. 제씨는 재입사 당시의 감회를 “연말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제씨는 “건조된 1만t급 선박을 유압장치를 이용해 바닷물 속으로 밀어낼 때의 뿌듯함 같은 것은 누구도 맛볼 수 없을 것”이라며 “수백 가지가 넘는 각종 장비에 대한 지식을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솔직히 말해 10년 전에 비하면 요즘 같아선 일을 할 만하다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70까지는 일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선실생산팀에서 목수 일을 하며 청춘을 바쳤다는 안문기(59)씨도 지난해 5월 재입사가 결정돼 2년째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안씨는 “정년퇴직이 임박한 지난해 초 사지가 멀쩡한데 벌써 퇴직해야 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며 독신자 숙소에서 고민도 많이 했다”고 했다. 부인과 1남1녀를 둔 안씨는 회사의 독신자 숙소에서 25년간을 지내 왔다. 그는 부산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지만 일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즐겁다.

이 회사 박종기 이사는 “만약에 풍부한 노동력과 싼 임금만으로 조선공업을 육성,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세계 1위의 조선왕국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며 “근로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노하우가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설명했다.

글=김재봉 객원기자(tailorbird@hanmail.net), 사진=곽태형 객원기자(knalt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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