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판화 보물단지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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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 ‘서울판화미술제 2004’ 가 특별기획으로 마련한 ‘한국현대판화의 흐름’전에 나온 김상유(1926~2002)의 목판화 ‘고택’(왼쪽)과 오윤(1946~86)의 목판화 ‘할머니’. 두 사람은 전통 판화기법을 이어받아 현대화하는 작업에 애쓴 대표 작가로 꼽힌다.

"판화 작가는 많지만 판화 찍어서 밥 먹고사는 이는 없다고 봐야지요. 화랑도 판화 팔기가 어려우니 판화전시를 기획할 수가 없어요. 미술품 한점 집에 걸고 싶은 이들에게 적은 돈으로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판화를 권해 보지만 이상하게 싸구려라는 선입견이 앞서서인지 판화는 사기를 꺼려해요. 유화나 동양화만 진본으로 보는 편견이 문제입니다."

한국판화미술진흥회 엄중구 회장(샘터화랑 대표)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1994년부터 열어온 판화 견본시(見本市)인 '서울판화미술제'가 올해 열 돌을 맞아 판을 벌일 참이다. 화상들은 미술시장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판화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이 살아날까 살피는 눈치다.

*** 화랑들 마구잡이 판매

4월 2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제10회 서울판화미술제'는 국내외 화랑 18개가 참가해 150여명 작가의 다양한 판화 700여점을 선보인다. 국내 최대의 판화전람회지만 판화에서 멀어진 관람객들 마음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판화 작가와 공방 전문가 등 판화 관계자들은 이런 판화 기피현상을 불러온 바탕에 바로 화랑이 있다고 말한다.

판화는 다양한 기법으로 판(版)을 만들어 똑같은 작품을 여러점 찍어낼 수 있는 대표적 복수(멀티플) 미술 형식으로 꼽혀 왔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한번에 한점밖에 제작할 수 없는 동양화나 유화에 비해 판화는 상대적으로 값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장점을 지녔다.

*** 싸구려라는 인식 강해

이는 대형 건물과 호텔.병원 건설이 늘어난 90년대 후반에 판화시장이 반짝 호황을 누린 까닭이다. 널찍한 벽면을 채울 고급스러운 장식품이 필요했던 건설업계는 화랑에 '싸면서 빠르고 많이' 공급받을 수 있는 미술품을 주문했고 화상들은 제대로 된 판화보다 널리 알려져 있던 화가들의 그림을 떠내는 방식으로 급하게 앞가림을 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대응이었던 셈이다.

목판화가 김준권씨는 "판화만의 독특한 기법을 살린 작품을 '창작판화', 화랑이 이렇게 팔기 위해 만든 판화를 '기획판화'로 구분한다"고 설명했다. 물량이 넘쳐나는 '기획판화'가 동네 액자가게에서 단돈 몇만원에 팔리는 현실에서 '창작판화'는 설 땅이 없어지게 됐다.

김씨는 "일반인이 판화 고유의 아름다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판화는 헐값에 살 수 있는 인쇄물 정도로 전락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미술의 대중화를 내세워 판화를 선전했던 화랑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자기 발목을 잡은 꼴이 된 것이다.

*** 이미지 개선 노력 눈길

이런 상황에서 열리는 올 서울판화미술제는 판화시장을 되살리려는 화랑들 노력이 엿보여 눈길을 끈다.

국내 판화사를 훑는 특별전 '한국현대판화의 흐름전', 4월 10일 오후 3시에 열리는 '판화작품 경매전', 신인 판화작가 발굴 공모전인 '벨트(BELT) 선정작가전', 목판.에칭.메조틴트 등 판화기법을 관람객이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판화기법워크숍' 등이 마련됐다. 매 2004번째 유료 입장객에게 판화를 증정하는 행사도 손님을 손짓한다.

판화가 남궁산씨는 "왜 판화여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만의 이론적 토대가 필요하다. '팔만대장경'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아직 틀도 잡지 못한 한국판화사를 정리하는 일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02-518-6323.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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