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광장 문화를 위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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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호 02면

막 시청 앞에서 돌아왔습니다. 시위대가 예상보다 적게 모였더군요. 1980년대식 시위와 비교해 좋게 말해 축제, 나쁘게 보자면 난장판이더군요. 광장 동서쪽의 대형 스피커에서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산만했습니다. 교통이 통제된 시청 앞 도로 한가운데서 기념 촬영하는 젊은 커플, 스쿠터에 매달려온 어린 학생, 고급 자전거를 탄 동호회 아저씨, 유모차를 끈 젊은 엄마 등은 달라진 시위문화의 주인공들입니다(4면). 도축된 검은 소의 머리를 들것에 얹고 행진하는 농민단체 회원의 그로테스크한 퍼포먼스는 섬뜩했습니다. 경찰이 막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남대문 경찰서장님, 민주 시민의 길을 막지 마십시오”라며 외치는 분, 총학 깃발을 높이 들고 줄지어 움직이는 대학생들은 아무래도 구시대적이란 느낌을 주었습니다.

시위 양태는 달라졌지만 시위대가 거리로 나온 원인은 같을 것입니다. 뭔가를 외치고 싶어서죠. 구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미친 소 너나 많이 처먹어라’ 같은 쇠고기 수입 반대. 둘째는 ‘(공기업) 민영화 반대’ 같은 정부 정책 반대. 셋째는 ‘공안정국 조성하는 이명박 탄핵하라’ 같은 정치 구호입니다. 모인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겠죠.

어찌 보면 민주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광장 문화입니다. 민주화 이후 청계천이나 시청 앞 광장 같은 물리적 공간이 생겼고, 월드컵 응원처럼 잡혀갈 위험이 없는 야외 집회에 익숙해졌습니다. 정치적 욕구가 팽배할 때 광장은 늘 그 출구가 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들의 욕구를 흡수해 주는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해야 선진국이라는 점입니다.

시위대가 급속히 불어난 것은 정부나 여야 정당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지난달 대국민 사과를 하고서도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여당 대표는 정부에 국정쇄신을 제대로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야당은 한술 더 떠 제도(국회)를 외면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곧 국정쇄신 안을 내놓는다니, 늦었지만 다행입니다(1면).

이번에도 조치가 미흡하다면 촛불은 한여름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6·10 항쟁, 효순·미선양 사건(13일), 6·15 공동선언, 그리고 7월의 부시 대통령 방한까지 시위의 호재가 이어지니까요.

오늘로 Chief Editor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그동안 관심을 보여 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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