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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실락원’의 밀턴, 알고보니 열혈 혁명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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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밀턴 평전
박상익 지음, 푸른역사, 472쪽, 1만5900원

‘실락원’으로 유명한 영국 시인 존 밀턴(1608~74). 통념 속의 밀턴은 파라다이스를 노래하는 우아하고 부유한 귀족 같은 문학가다. 하지만 밀턴은 문학가 이전에 정치개혁가였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운동가였다. 그의 탄생 400주년에 나온 『밀턴 평전』은 시인을 현실에 도전하는 혁명가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밀턴의 시대는 ‘종교권력+왕당파’의 천년 권력에 ‘청교도+공화파’ 세력이 도전하는 종교개혁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권력과 돈은 종교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정치개혁, 체제개혁이었다. 밀턴은 천재적 문학성을 사상과 표현, 신앙과 양심의 가치를 열렬하게 호소하는 팜플렛 제작과 평론 쓰기에 바쳤다.

41세의 밀턴은 왕당파의 지도자인 찰스1세의 처형을 옹호하는 논객이었다. 공화파 혁명을 성공시킨 뒤 크롬웰 밑에서 외교부 장관을 맡았다. 구세력이 지배하던 유럽 전역을 향해 혁명의 당위성을 전파했다. 찰스1세의 처형을 옹호하는 글은 400년이 지난 오늘도 보편적인 격동을 자아낸다. “군주정은 인민을 왕의 종으로 격하시켰다. 인간성을 모독하는 정치체제였다.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 대한 모독은 곧 신성모독이다.”

지금 세상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돈과 상품, 종교조차 신성의 인간을 모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권력중독, 배금성, 물신성이 개인의 영혼까지 잠식해 스스로 인간모독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밀턴의 ‘인간=신의 형상’이라는 인간 존귀선언이 오늘의 얘기처럼 들린다.

밀턴을 더 극심한 고통 속에 몰아넣은 건 혁명이 그를 배반할 때였다. 공화파의 중심인 장로교회 세력은 권력을 잡은 뒤 왕당파가 했던 것처럼 출판의 자유를 금했다. 그 뒤의 독립파도 똑같은 행태를 보였다. 그 충격에 밀턴은 실명상태에 빠져든다. 이후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향한 밀턴의 정열은 정치현실 너머 인간영혼의 개혁을 향하게 된다. 그 때 나온 게 ‘실낙원’이다.

저자 박상익 우석대 교수(55·서양사)는 대학생 시절 독서클럽에서 처음 밀턴을 접하면서 모국어와 공동체에 대한 애정에 눈을 떴다. 이 불굴의 이상주의자에 매료돼 30여 년 무교회주의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 평전 첫 장인 ‘나의 마지막 회상’은 밀턴이 지금 살아서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했다. 인문학과 대중의 소통을 평생 추구해온 저자의 땀과 영혼이 담겨있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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