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만든 영화 "유리"여주인공 이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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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20대 신인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영화 『유리』(감독 양윤호)가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에 들어갔다.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원작으로 한 『유리』는 원작의 난해함 때문에 기성영화인들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작품.그러나 이번 촬 영기간중 제작진이 보여준 열정은 애초의 우려를 기대로 돌려놓을 만했다.
그 공신중의 한명이 바로 여주인공 이은정(21).
동국대 연극영화과 3학년에 재학중 휴학하고 영화에 뛰어든 그가 맡은 배역은 광기에 찬 수도승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비구니「누이」역.가냘프고 맑은 외모에 늙은 창부의 속내를 가진 독특한 역할이다.
『유리라는 인물은 창부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 존재의 뿌리없음에 고통받다 33세때 구도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에요.모든 현세적인 가치를 무의미하게 느껴 살인과 정사와 자학으로 구도하는 인간을 상상해보세요.보통 사람들이라면 공포를 느끼 겠지요.그러나 누이는 이 인간에게 사랑을 느껴요.아주 맑은 공기같은 여자이거나 스무살 나이에 세상을 다 살아버린 조로한 허무주의자가 아닐까 싶었어요.어쩌면 그 둘 다인 것같기도 했고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에 나오는 순수한 백치 젤소미나와 같은여자.그러나 훨씬 점성이 강한 여자 「누이」.그녀의 이미지는 이 영화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이미지이기도 하다.초월을 꿈꾸면서도 단 한치도 자궁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 인공들.그들이 꿈꾸는것은 자궁속에서 해탈하는 것이다.주인공 유리는 40일간의 구도를 끝내면서 죽음 직전에 읍내 장로의 손녀인 「요니」(이 단어자체가 자궁이라는 뜻)와 여든네가지 체위로 28회의 정사를 나눈다. 『솔직히 이 영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하게 이해한 건 아니었어요.그러나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누이라는 인물에강한 친밀감을 느꼈어요.』 그녀는 영화의 반이상을 진흙탕속에서촬영한 『유리』를 적성에 맞다고 말한다.얼핏 「낙지같은 여자」가 연상된다.그러나 그는 먼 곳을 응시하는 맑은 눈을 갖고 있다.도저히 그 험한 역을 해냈을 법하지 않다.그러나 주변에서는이 점을 그의 가능성으로 꼽는다.감정을 응축하는 여유와 폭풍전야같은 술렁거림이 함께 있다는 것.연출가를 꿈꾸며 대학에 들어갔지만 이내 업종을 연기로 바꾼 그는 앞으로 관객과 좀더 직접적으로 통할 수 있는 연극을 해볼 작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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