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역사를 바꾼 평론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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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18면

로버트 파커. 와인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 명성을 들어 봤을 이름이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와인 비평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가 준 평가 점수는 전 세계 와인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바로 그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기와 존경을 한꺼번에 받고 있다.

최고의 보르도 빈티지 중 하나인 1947년에 태어난 파커는 젊은 시절에는 와인을 접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그가 와인을 알게 된 것은 사랑에 빠졌던, 그래서 지금 그의 부인이 된 펫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대학 중반에 프랑스어 공부를 위해 알자스로 떠났고 파커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날아갔다.

함께 지낸 몇 주 동안 파커는 시골뜨기 미국 청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프랑스 식문화와 만나게 된다. 세련된 음식과 품격 있는 와인, 미국에서 마셨던 와인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에 청년 파커는 매료되었고 그의 인생은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된다. 파커는 우선 안정된 경제생활을 위해 변호사 일을 했고 꾸준히 와인 시음으로 기초를 닦은 이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자 평소 꿈꾸었던, 소비자를 위한 와인 가이드 뉴스 레터지 ‘와인 애드버케이트(Wine Advocate)’를 창간한다.

파커가 중점을 둔 것은 보르도 고급 와인이었다. 60년대 중반부터 고급 식문화가 뉴욕을 거점으로 활성화됐고 70년대 들어서는 상류층이 이들 와인을 폭발적으로 선호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파커의 샤토 방문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름다운 부인 펫의 완벽한 프랑스어와 상냥함이 두터운 유명 샤토의 문을 열게 했고 시음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이 채택했던 ‘100점 기준’은 미국인에게 친근하게 인식되기 시작했고 와인 소매상들 사이에 파커의 레터지가 알려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고 했던가. 운명의 여신이 파커를 향해 미소를 지은 것은 82년산 보르도 와인 때문이었다. 파커는 83년 3월 첫 통을 시음한 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82년산이 완벽하고 균형 잡힌 와인임을 동물적으로 직감했다. 당시 프랑스의 저명한 양조 교수 에밀 페노 역시 82년을 61, 59, 49, 47년과 같은 세기의 빈티지로 규정했다. 파커는 82년 슈발블랑 96점, 오브리옹 96점, 라피트 로실드 100점, 라투르 94점, 레오빌 라스카스 100점, 마고 98+, 미시옹 오브리옹 100점, 무통 로실드 100점을 주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레터지의 책임자 피니건은 “82년은 주목할 만한 빈티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파커의 반박 역시 거셌고, 결국 이 논쟁은 대대적인 비교 와인 시음으로 전개됐다. 결론적으로 파커의 충고를 따라 구매한 소비자는 나중에 몇 배의 이익을 남기게 되었다. 피니건의 의견을 존중했던 또 다른 와인 전문가 로바로 역시 파커와의 대결에서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오랜 세월 파커 자신만의 고집으로 와인을 평가한 결과가 마침내 대중에게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파커의 뉴스 레터지는 더 많은 구독자를 확보했고 특히 소매상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미국에서 하나의 투자 대상으로 와인을 사들였던 사람들에게 파커의 뉴스 레터지는 선물시장에서 어떤 와인을 구매하면 이익을 볼 수 있는지 확실한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파커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은 와인은 미친 듯이 팔려 나갔고, 그렇지 못한 와인들은 재고로 남아 있어야 했다.
프랑스인은 그들의 와인이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것에는 긍정적이었지만 문화적으로 세련됨이 없다고 생각되는 한 미국인에 의해 자신들의 와인 품질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파커 스타일 와인’이란 수식어가 등장한다. 이것은 프랑스 와인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던 섬세하고 우아하며 오래 숙성시키는 미덕과는 거리가 있는, 과일 향이 풍부하고 진해 조금은 천박하게 느껴질 수 있는 신세계적인 스타일의 와인을 비꼬는 말로 쓰였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쟁으로 이어진 것은 샤토 파비(Ch. Pavie) 때문이다.

파커는 이 와인에 좋은 점수를 주었고, 심지어 2000년산은 100점을 주었다. 98년에 오너인 페르스는 파비를 사 내부를 완전히 개조했고 포도밭도 다시 조정해 본래의 파비 스타일을 없애고 새로운 와인을 만들었다.

이에 영국의 전통적인 와인 비평가 잰시스 로빈슨은 파비를 형편없는 와인으로 취급하며 파커에게 반기를 든 것. 하지만 파커가 지금까지 30만 병 이상의 와인을 시음한 전문가임을 생각한다면 그의 시음 결과에 대해 어느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시각 차이일 뿐. 이 때문에 샤토 파비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필자는 파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떤 형태의 것인지는 알 수 있게 됐지만 이들이 필자가 선호하는 와인과 모두 일치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와인 선호도의 차이 때문인데, 이는 서로 존중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파커가 미국 사람이고 가장 미국적인 상업주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그의 와인 점수는 일반인에게 획일화 내지 신격화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 명의 영웅이 지구를 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할리우드식 사고’가 파커의 점수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 파커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와인 강연을 하고 호화로운 저녁 모임의 주빈이 되었다. 얼마 전 일본에서는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데 한 개인이 100만 엔을 지불했어야 할 정도다. 이런 대단한 와인의 거장이 서울 나들이를 한다. 부부간에 자식이 없어 한국 아이를 입양한 그는, 딸의 고향인 한국에서 40년 이상의 세월을 바친 와인 열정에 대해 짧은 시간이나마 이야기해줄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29일 신라호텔의 VIP 만찬 석상에서는 그가 오랫동안 좋은 점수를 주었던 인시그니아(Insignia)의 6개 빈티지를 시음한다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지만 프랑스의 세련된 양조 방식으로 만든 섬세하면서 구조가 단단하고 힘이 있어 오랜 숙성이 가능한 와인이다.

소개되는 빈티지는 최고 연도 중 하나인 97년(96점)과 98년(91점), 2000년(91점), 2002년(96점), 2003년(94점), 2004년(95)이며 파커가 왜 이 연도에 이 점수를 주었는지 분명 해명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20년 동안 필자는 와인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좀 괴팍한 면은 있지만 내면에 순수함이 아주 많이 살아 있음을 보아왔다. 아마 파커도 이런 부류의 사람이지 않을까. 그의 딸을 위해 좋은 추억이 되는 한국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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