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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은밀한 말씀과 내레이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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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37면

서장(序章, Prologue)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살아있는 독자들이여!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라

지난주에 우리는 이 서장의 언어에서 4개의 해석학적 함수를 끄집어 내었다.
①화자(Speaker) 예수 ②청자(Listener) 예수의 청중 ③기록자(Recorder) 도마 ④독자(Reader) 도마공동체.

오늘날에는 이 초대 교회 동굴 위에 희랍가톨릭 교회가 건축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정교한 모자이크로 내외벽이 장식되어 있다. The Sanctuary of Our Lady of Mantara, Maghdouche, Sidon, Lebanon.

그러나 서장의 언어는 이 4개의 함수로 완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4개의 함수를 모두 지배하는 가장 결정적인 함수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는 예수가 하신 말씀을 도마가 기록했고, 그 도마의 기록을 우리가 읽는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한번 서장이 이렇게 기술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나 예수의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만약 이 기술 자체가 유다 도마의 1인칭 서술로 되어 있다면 상기의 4개 함수로 서장의 메시지는 완료된다. 그러나 “유다 도마가 기록하였다”는 것은 3인칭 기술이다. 즉 3인칭 기술을 하고 있는 1인칭 내레이터(Narrator)가 4개의 함수 모두를 지배하는 연출자로서 가려져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예수의 말씀을 도마가 기록하였다. 그러나 도마의 기록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은 도마가 아니요, 어디까지나 내레이터의 몫인 것이다. 내레이터가 도마의 기록을 선택하고 편집하여서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제시한 것이다. 도마는 내레이터라는 연출자에 대하여 부속적 위치밖에 지니지 못하는 존재이다. 도마복음서는 도마에 의한 복음서가 아니요, 도마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내레이터에 의한 복음서일 뿐이다. 도마는 기록도 하지만 대화의 한 담당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레이터가 과연 누구일까? 물론 우리는 그 역사적 실체를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다.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이 도마복음서를 창출한 본인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과연 그는 어떠한 목적으로 이 도마복음서를 만들었을까?

이러한 질문도 우리는 거창한 학문적, 역사지식적 배경을 동원하여 답변할 필요가 없다. 서장 그 자체 내에 그 해답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의 열쇠가 바로 ‘은밀한’ ‘비밀스러운’(secret)이라는 이 한마디이다. 희랍어로 아포크리포스(apokryphos)라는 이 말은 ‘숨겨진’(hidden)이란 뜻이다.

이 “은밀한 말씀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도마복음서를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영지주의 문서로 간주하기 일쑤였다. “은밀한 말씀”은 곧 천국으로 가기 위한 비밀스러운 영지(gnosis)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아주 선택된 소수에게 비밀스럽게 계시되는 말씀으로서 그냥 논리적으로 규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도마복음서를 영지주의 문헌이라고 한다 해도 나는 그러한 규정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규정해 버린다고 한다면 바울의 서한이나 4복음서 전체가 영지주의 문헌일 수밖에 없다. 영지주의적 요소는 바울에게나 복음서 기자들에게, 특히 제4복음서의 저자에게 매우 명백하게 드러나는 성향이다. 영지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영지주의라는 개념 그 자체를 파기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 “은밀한”이라는 형용사가 수식하고 있는 대상은 “말씀”이다. ‘말씀’이란 ‘살아 있는 예수’가 ‘말한 것’이다. ‘말했다’ 하는 것은 ‘어떤 논문을 저술했다’ 함이 아니다. 저술은 시공을 초월하여 대상성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말함’은 반드시 시공의 제약을 받는다. 필연적으로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몇몇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죽은 예수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예수가 말하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말은 항상 생동적이며, 함축적이며, 상징적이며, 감동적이다. 따라서 신비로울 수밖에 없고 은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쉽게 요해(了解)될 수 있는 사태가 아니다.

여기 ‘은밀하다’는 말은 크게 두 가지 뜻을 내포한다. 하나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수수께끼 같아 좀 고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냥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풀어서 체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선택된 소수에게 조용히 말한다는 뜻이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떠벌릴 필요가 없는 은밀한 말들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모든 진리의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이 은밀한 말씀은 죽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수의 말이다. 그러나 한번 반문해 보자! 이 도마복음서가 집필되었을 당시 예수가 살아 있었나? 천만에! 예수는 이미 죽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이 세상에서 스러진 후였다. 이제 내레이터가 노리는 목적은 명백해진다. 독자의 의식 속에서 예수가 살아 움직이면서 이야기하듯이 도마의 기록을 연출하겠다는 뜻이다. 그 과정은 은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 비밀”과도 같은 구차스러운 숨김이 아니다. 독자의 의식 속에서 예수가 살아 움직인다는 뜻은 곧 도마의 기술을 통하여 독자가 예수가 살아 있을 때 은밀하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하여 감동을 주었던 바로 그 장면으로 이입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이입이야말로 살아 있는 예수에게로 들어가는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이다.

이 이니시에이션은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다. 그러나 이 특권은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다. 결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다. 변통 없는 비밀만을 간직하려 했다면 이 책을 썼을 리가 만무하다.

서장의 언어가 노리고 있는 궁극적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살아 있는 독자들이 살아 있는 예수를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간의 어떠한 장치도 결국 방편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항간에 나의 ‘도마복음 이야기’를 참을성 없이 재촉하는 사람이 많다. 좀 진도가 빨리 나갔으면, 뭐가 그리 잔소리가 많노?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정치권력이 선전해온 거짓 예수를 버리고 이제 진짜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하고, 거짓된 장치나 치장을 다 벗어 버려야 한다. 그 과정은 심히 어렵고, 복잡한 퍼즐을 풀어 가는 것과도 같은, 스릴 있지만 난해한 과정이다. 그 과정을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자들은 복된 사람이다. 선택된 소수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던져지는 예수의 말씀들은 은밀한 것이다. 그 은밀한 말씀들을 통하여 독자는 비로소 천국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다음주부터 제1장이 강론된다.



▶5월 27일 오후 5시 서울 서대문 감리교신학대학에서 본지의 내용을 주제로 하여 사회적 의의를 선포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과 청년 신학도들의 대토론회가 열립니다. 제목은 ‘Q복음서와 한국교회’. 뜨거운 토론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뜻있는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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