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가끔 물구나무를 서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두 다리가 저리고 고관절 부분 통증이 심했다. 자기공명영상법(MRI)으로 척추 사진을 찍었다. 척추 4~5번 연골 부분이 터져 나와 다리 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의사는 진단했다. 병은 소문내야 한다. 많은 조언도 있었다. 전문의 의견도 들었다. 무턱대고 허리 수술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뉴욕 타임스 최근 기사도 정독했다. 외과 수술을 하지 않는 한 예방과 장기치료로 스트레칭과 물구나무 서기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네발 짐승이 두발로 서서 일을 하니 허리 아픈 게 당연하다. 곰 걸음(熊步)을 해 보라는 조언도 이와 부합했다. 단전호흡이나 요가에서 물구나무 서기는 기본 동작이다. 한번쯤 거꾸로 매달리는 것 또한 신체 전체를 흔들어 놓는 중요한 순환요법이다. 그래서 나는 물구나무 서기를 자주 하기로 했다.

*** 주류세력 순환돼야 강한 사회

사회의 체질 또한 인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사회를 이루는 중심세력이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보면 온갖 병폐가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이 사회의 정치적 중심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이 이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병을 예방치 못했고 오래 전 발병해 그 병이 깊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채 호기를 부리다 무너지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뿐인가. 이 사회를 주도했던 중심세력들, 학벌 좋고 잘난 주류세력들, 보수의 전사를 자처했던 세력들도 세상이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렇게 달라지는가 하는 허망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갑작스레 달라지지 않는다. 조금씩 달라져 왔고 또 앞으로도 조금씩 변하겠지만 중심.주류.보수세력들이 조금씩 달라져 온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탄핵 가결이 있던 날 오후 3시, 중앙일보 인터넷 신문에 공서환의 '대통령이 던진 밑밥 덥석 물은 한민당'이라는 글올림에 무려 15만명에 달하는 조회가 잇따르고 댓글이 올랐다. 대통령이 선거전략으로 탄핵 당하기를 각오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몰아붙였는데 이를 모른 야당이 덥석 물어 정국은 크게 요동치리라는 예측을 했다. 음모론이다, 아니다로 열띤 공방전이 벌어졌다. 정치상황을 일반시민들이 정치인들보다 더 꿰뚫고 있고 찬반 편가르기는 가위 내전상태라 할 만큼 치열하다.

이 사회의 주류세력들은 오만했다. 비주류의 슬픔에 등한했고 주변부의 고통에 나 몰라라 했다. 진보를 무작정 과격으로 몰았지 그들의 변화욕구를 수용할 통로를 마련치도 못했다. 광화문 촛불시위대를 동원 군중이라고 몰아붙이지 말고 주류.중심.보수세력들의 무관심과 등한, 그리고 오만 속에 키워진 불만.불평의 응집이라 보고 사죄.반성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진작 천막당사로 옮길 만한 의지를 보였다 해도 이런 파멸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중심의 주변화, 주류의 비주류화, 보수의 진보화를 위해 이 사회의 이른바 모든 기득권 중심세력들은 대오각성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부턴 물구나무 서기를 해야 한다.

헌재의 탄핵 결정이 탄핵 부적합으로 판정날 때, 총선에서 지금 여론조사대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때 비주류.주변부.진보세력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민혁명이 달성됐다 환호하고 그중엔 세상이 뒤집혔다고 핏발 어린 눈길로 거리를 누비는 문혁시대 홍위병을 방불케 할 무리도 있을 수 있다. 재신임을 확보한 대통령은 긴 칼 차고 일당독재를 할 것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상정할 수 있다. 또 한번 우리는 광기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막연한 불안에 휩싸일 것이다.

*** 냉혹함을 온화함으로 바꿔야

여러 민주화세력 중 특히 386 민주화세력은 주류세력에 대한 증오와 보복의 칼을 은밀히 갈아 온 얼음 같은 냉혹함이 번뜩인다. 그들 중 일부는 혁명을 꿈꾸고 진보의 쿠데타를 열망할지도 모른다. 주변의 중심화, 비주류의 주류화, 진보의 보수화를 위해선 증오와 복수의 칼을 회수해야 한다. 냉혹함을 온화함으로 바꿔야 한다. 이를 위해 주변부.비주류.진보세력들도 끊임없이 중심화.주류화.보수화를 위한 물구나무 서기를 해야 한다.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화나면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보수의 오만에 격랑이 일듯, 진보의 증오와 냉혹함에 또 어떤 격랑이 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총선에서 의석의 황금분할이 있어야 보수의 오만을 막고 진보의 증오를 수렴하는 강한 사회의 허리를 갖출 수 있다. 허리가 강해야 체력이, 국력이 강해진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