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예수는 어느 나라 말을 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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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37면

서장(序章·Prologue)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54. 성서와 해석학

이 서장의 언어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해석학적 함수로서 우리는 다음의 4기둥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화자(Speaker)인 예수가 있다. 둘째는 청자(Listener)인 예수의 청중이 있다. 셋째는 기록자(Recorder)인 도마가 있다. 물론 이 기록자가 당시의 청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상식적으로 이러한 사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사료된다. 예수가 장기간에 걸쳐 다른 상황에서 말한 말씀들을, 아무리 예수의 쌍둥이라 할지라도 도마라는 한 사람이 모두 따라다니면서 그 당장 당장에 기록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좀 어폐가 있다. 자기가 직접 들은 이야기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다양한 전승을 후대에 종합·편집해 기록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넷째로 독자(Reader)가 있다. 말은 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기록은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말은 순간적이지만, 기록은 보존만 잘 된다면 거의 영구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로칼리티(locality)를 뛰어넘는 공간적 보편성이 있다. 그 언어를 매개로 하는 모든 문화권을 들락거릴 수 있다. 기록은 이와 같이 시간적 영구성과 공간적 초월성을 지니지만, 그래도 일차적으로는 구체적인 대상성을 확보해야 한다. 누가 읽는가? 그 독자의 요구가 없으면 기록이라는 행위는 일방적으로 일어나기는 어렵다. 아마도 도마의 기록은 도마공동체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우선 이 관계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기다림의 언덕 막두쉐(Maghdouche)에서 시돈항을 바라보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 시돈은 연안에 비교적 큰 평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수량이 풍부해 풍요로운 농경이 가능했으며, 교역과 뮤렉스 자색염료와 유리공업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석관들의 정교한 아름다움은 시돈문명의 높은 수준을 입증한다. 지금도 트랜스아랍 송유관의 지중해 종착지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2000년의 성상을 견디어 내 오늘 한국의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이 행위는 도올 김용옥이라는 번역자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나 도올은 반드시 2개 국어 화자가 되어야만 한다. 번역은 한국 독자의 인식체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올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콥트어 도마복음서의 의미체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오늘의 한국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체계로 전환시키는 작업에는 고도의 해석학적 과정이 개입된다.

이렇게 따지면 함수가 매우 복잡해진다. 그러나 F독자에게 남는 최종적 사실은 매우 단순하다. 그들은 도올이라는 E번역자가 제시하는 21세기 한국어 문장을 접할 뿐이다. 문자의 해독은 의미의 발생으로 가능해진다. 의미의 발생은 쌍방적 교감(交感)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최종적인 F독자의 교감은 일차적으로 E번역자와의 사이에서 21세기 한국어를 매개로 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어가 예수의 말일 수는 없다. 그것은 실상 알고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21세기 시공의 의미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교감으로 인하여 성립한 우리의 의미체계가 궁극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은 A화자 예수와 B청자 예수의 청중 사이에서 일어난 교감과의 역동적 상응성(dynamic equivalence)을 확보하는 것이다. 여기 ‘역동적 상응성’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예수의 말을 사전적으로 번역한다고 하는 축어적 일치성(verbal consistency)이나 형식적 대응성(formal correspondence)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 사이에서 일어난 의미의 반응체계와 E와 F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반응체계를 상응시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평면적이고 일시적이고 고정적인 정답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예수의 말 그 자체는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말과 예수의 청중 사이에 오간 교감의 체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추론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C기록자 도마와 D독자 도마공동체 사이에서 성립한 교감을 통해 추론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E·F의 교감은 C·D의 교감을 통해 A·B의 교감으로 상응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갈망은 실제로 끊임없는 노력일 뿐이다. 그 노력의 과정을 ‘역동적 상응성’이라고 나는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 개입된 언어의 문제만 생각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진다. 예수가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보통 갈릴리 지역에서 통용되던 아람어(Aramaic)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100%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는 아람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특수한 토속언어로 규정하기 쉽지만, 실제로 아람어는 당시에 히브리말보다 훨씬 더 광범하게 쓰인 국제통용어(lingua franca)였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이미 구어로서 히브리말을 사용하지 않았다(James M. Robinson, The Gospel of Jesus, p.55).

아람어도 다양한 방언이 있기 때문에 예수가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을지, 그것을 단정지을 길이 없다. 제1세기 갈릴리 아람어 사본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과연 도마가 기록했다 할 때에도 그것이 아람어로 기록된 것인지 희랍어로 기록된 것인지 확정 지을 길이 없다. 희랍어로 기록되었다면 그때 벌써 번역이라는 해석학적 과정이 개입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달된 사본은 희랍어를 이집트말인 콥트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해석작업에는 최소한 4개 국어의 번역 과정을 통한 인식의 전환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도올은 시시콜콜 따지는 것이 많으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반문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성서라는 문헌을 대하는 놀라운 단순성과 무지에 관한 것이다. 성서는 고문헌이다. 고문헌은 고문헌학의 엄밀한 방법론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일반 신도들은 “내가 요구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일 뿐이다. 그 말씀을 통하여 신앙을 얻으면 그뿐이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신앙은 맹목과 맹종을 초래할 뿐이다. 맹목은 융통을 거부하며, 변통을 기피한다. 그것은 독단과 배타를 생산할 뿐이다. 결국 독선(獨善)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만연된 독선의 질병이 우리 사회의 변화와 소통을 저해하고 있다면, 나는 우리 민족이 성서라는 문헌에 대한 편협한 인식의 질곡에서 해방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은, 성서라는 문헌에 대한 기초적 수준의 상식조차도 지니지 못한 성직자나 허세에 절은 식자들의 권위주의적 강요에 굴종하면 안 된다. F독자로부터 A화자까지 도달하는 길은 너무도 험난하다.

F이든 A이든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F라는 오늘의 한국인도 역동적으로 변하는 존재이며 A라는 예수도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존재이다. 이 두 아이덴티티 사이의 교감은 궁극적으로 F의 실존적 체험의 문제지만, 그 체험을 구성하는 요소는 무한히 다양하고 중층적인 인류의 체험을 포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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