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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 이주노동의 또 다른 출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뉴스위크세계화의 물결은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국제결혼 증가도 불러왔다. 최근 들어 한국에 시집오는 동남아 여성이 부쩍 늘었다. 이들이 이혼 또는 가출하는 경우 가정 파탄 등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가출을 결심한 순간 대부분이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최근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국제결혼 이주 여성의 결혼 출산행태와 정책방향’ 보고서는 국제결혼과 노동력 유입의 상관관계를 비교적 상세히 보여준다. 특히 중국과 동남아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 방법은 노동 이동, 성 매매 이동, 국제결혼 이동 등 다양하다. 한국은 노동시장 이동이 상당히 엄격한 탓에 국제결혼이 노동 이동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게다가 이윤을 목적으로 결혼을 상품화하는 결혼중개업체가 늘어나면서 허위정보와 비싼 중개료를 통해 성사되는 국제결혼이 증가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들 여성을 배우자가 아니라 돈을 주고 사온 소유물이나 가정부처럼 여기는 사례도 있다”고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밝혔다. 즉 외국여성들을 돈을 벌 목적으로 결혼한 사람으로 여기다 보니 남편들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가정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국제결혼 이주 여성들은 한국 내 거주기간 2년을 채우면 국적 취득이 가능하지만 원칙적으로 남편이 보증을 서야만 가능하다. 이를 지렛대로 외국여성을 억압하는 경우도 있다고 여성단체들은 주장한다.

미 국무부가 지난달 발표한 ‘2007년도 인권 보고서’에서 “구 소련 국가들, 중국,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으로 인신매매돼 성 착취를 당하거나 가사 노예로 일한다”고 한 것도 이런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다.

얼마 전 서울 가리봉동 한국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에 한 태국인 여성이 가사 노동으로 혹사 당했다며 상담을 요청했다. 한 종교단체의 소개로 한국인 남성과 국제결혼을 한 이 여성은 숙박업소를 운영하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한집에 살았다.

시댁이 비교적 부유해 한때는 태국의 친정에도 용돈을 부칠 수 있을 것이란 꿈에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한 달에 잡비로 10만원 정도만 내줄 뿐 그에게 경제권을 맡기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숙박업소의 허드렛일은 모두 그녀의 독차지여서 종업원 취급을 당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녀가 임신을 하자 남편은 낙태를 강요하면서 폭력까지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은 뒤로도 남편의 학대가 그치지 않자 그녀는 태국 친정에 아이를 맡긴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시댁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시어머니는 살아 있는 손주가 죽었다고 사망신고를 했고, 그녀에겐 가출을 이유로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고 나서야 남편과 시어머니는 호적을 정정해 주었다. “아마 시어머니와 남편은 이 태국 여성이 국내 거주 기간 2년을 채워 국적을 가지면 갈라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한국외국인근로자 지원센터 최병규 팀장은 설명했다.

평범한 국제결혼 가정에서도 부부간의 애정에 금이 가거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 극단적인 결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경북 예천에서 국제결혼 부부 쉼터인 ‘사랑방’을 운영했던 권혁대씨는 “한국에 먼저 들어온 불법 체류 외국인들이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동포 여성들을 부추겨 도시지역으로 빼돌린 일도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국제결혼 여성을 도시지역 근로자로 팔아 먹는 브로커들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이는 2000년대 들어 국제결혼이 급증한 사실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인 남성 1명이 동남아 현지에서 맞선을 보는 여성은 10~20명에 달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국제결혼을 하려는 남성이 늘어나면서 현지 여성의 공급이 달리게 됐다. 그래서 현지 결혼중개업자들은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서 유흥업소 등 가리지 않고 여성들을 끌어 모으는 일까지 생겨났다. 결국 결혼을 통한 정착보다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여성들이 신붓감으로 둔갑하게 됐다.

이들 국제결혼 이주 여성이 한국에 와서 잘살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 남자-외국인 여자 부부’ 이혼 건수는 5974건으로 2006년 4010건에 비해 44.5%나 늘었다. 지난해 결혼한 ‘한국인 남자-외국인 여자 부부’는 2만9140쌍이다. 결국 5쌍이 결혼하는 사이 1쌍은 갈라선 셈이다.

올 3월 말 현재 국내에 불법 체류 중인 베트남인 수는 1만57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 가운데 10여 년 전부터 이주 노동자로 들어와 한국에 눌러앉게 된 베트남인도 2300여 명을 헤아린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점조직을 통해 국제결혼 이주 여성들을 도시지역 근로자로 빼돌리는 브로커 역할을 한다고 권혁대씨는 전했다.

권씨는 한때 수십 명의 베트남 여성을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했고 자신 또한 베트남 여성을 부인으로 맞았다. “돈 벌려고 오는 여성과 한국에서 결혼해 살려고 온 여성들은 짧으면 3개월 길게는 6개월 안에 판가름 난다”고 권씨는 설명한다.

베트남 송금을 목적으로 오는 여성들은 남편의 경제력이 시원찮으면 가정을 유지해야 할지, 돈을 벌어야 할지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쯤 외부의 베트남인 브로커들이 접근해 온다. 간혹 본국에서부터 선이 닿은 경우도 있지만 먼저 가출한 여성들이 새로 시집온 여성들을 부추기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실생활은 숨긴 채 “좋은 데가 있으니 집을 나오라”는 식으로 유인한다.

“내가 중매했던 베트남 여성 중에도 그런 전화를 받았다”고 권씨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가출한 여성들이 예천에서도 두 자릿수에 이를 것이라고 그는 추정했다. 한국인 남편들이 아내가 국제결혼 여성들의 모임에 참석하거나 외출하는 데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유혹으로 가출한 외국인 여성들은 흔히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불행한 길로 내몰리기도 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불법 체류 노동 내지는 성매매 등 극히 일부일 뿐이다. 공단지역에 취업하는 이들마저 상당수가 알선료 명목으로 매달 일정액을 브로커에게 뜯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불법 체류 남성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권혁대씨는 “국제결혼은 첫 단추를 잘 꿰면 성혼이 되지만 악용되면 인력 송출로 변질된다”고 경계했다.

박성현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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