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기문 '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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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아버지를 속여 그의 아들을 낳은 다말, 로마의 장군들을 유혹한 클레오파트라, 그리스의 희극에 대표적 창녀로 묘사되는 아스파시아, 인기 없는 정치인 마거릿 대처, 성녀 혹은 악녀로 평가받는 에바 페론….

역사학자 정기문(37.군산대 사학과)교수의 '내 딸이 본받기를 바라는 여성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이다. 명필 한석봉의 어머니나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형 여성, 나이팅게일.테레사 수녀 등 헌신적 인물은 찾을 수 없다. 위인전에 단골로 등장하는 여성들과는 거리가 멀다.

정교수는 자신의 딸이 역할 모델로 삼기를 바라는 이러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엮어 24일 '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푸른역사)를 펴냈다.

책에는 앞서 소개한 다섯 명과 동로마제국의 황후 테오도라,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이스라엘 건국 영웅 골다 메이어 등 모두 9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결같이 남성들의 틈바구니에서 험난하게 산 인물들이다.

정교수는 "여덟살짜리 딸이 의사는 남자가, 간호사는 여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백설공주가 왕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부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안타까워 딸에게 줄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다말은 남편이 죽은 뒤 남편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친정에서도 천대받게 된 인생의 위기를 '시아버지의 아들'을 낳음으로써 해결한 현명한 여성으로 묘사됐다. 클레오파트라는 뛰어난 지성과 언어 구사력, 그리고 용기와 지략을 갖춘 인물로 평가했다. 사랑 때문에 조국을 버린 것도 아니며, 이기적인 거짓 사랑을 했다는 기존 해석도 그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게 매를 들어가며 수사학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진 페리클레스의 부인 아스파시아에게는 '여성 지식인의 원조'라는 명칭을 붙였다.

정교수는 그러나 "시아버지와 성관계를 맺고, 남성들에게 몸을 판 이야기를 어떻게 해준단 말인가"라며 당분간 이 책을 딸에게 읽히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일탈을 범하지 않았던 여성 영웅들을 선택했으면 좋았을 텐테 불행히도 세계사의 전개과정에서 일탈을 범하지 않은 여성들은 그냥 평범하게 살다가 사라지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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