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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땅 위의 연둣빛 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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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밭은 ‘4말5초’다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도순다원에 3월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다급함이 묻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카메라 하나 보지 못했느냐고 했다. 사진을 찍으러 들렀다가 깜빡하고 놔두고 왔다고 했다. 마침 다원에서는 문제의 사진기 주인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차밭에 근무하는 고승범씨는 “삼각대 위에 사진기를 올려놓고 그냥 간 게 신기했다”며 그날의 일을 기억했다. 왜 그랬을까 궁금했는데 해질녘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차밭을 돌아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끼와 까투리가 노는 연둣빛 바다를 걸으며 차밭에 온 목적을 잠시 잊었으니 말이다. 차밭에서는 남쪽으로 서귀포 앞바다가 내다보인다. 등을 돌리면 한라산이다. 찻잎이 2개쯤 나왔을 무렵 한라산 꼭대기에 밤새 눈이라도 내리면 차밭은 황홀경이다. 사진을 찍으러 왔던 그는 산에 홀리고, 움트는 새순에 빠지고, 뺨을 스치는 봄바람에 취해 사진기 세워놓은 것을 까먹지 않았을까.


차밭의 매력은 묘하다. 슬며시 다가와 은근히 마음을 흔든다. 높고 낮은 땅을 따라 물결치는 차밭의 S라인은 도시를 걷는 아가씨의 S라인 못지않다. 사람의 손길은 자연을 망가뜨리기 일쑤지만 때로는 말 못할 감동을 만들기도 한다.

제주도에는 아주 너른 차밭이 셋 있다. 서광다원, 도순다원, 한남다원이다. 서광이 먼저 생겼고 한남이 맨 나중에 생겼다. 모두 아모레퍼시픽에서 운영한다. 세 곳을 합한 면적은 국내 전체 재배 면적의 4.9%이나 생산량은 전체의 24%를 차지한다. 서광다원은 5만4900㎡로 셋 중 가장 크다. 단일 재배단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일본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시즈오카, 중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저장성과 어깨를 견줄 만하다.

차나무의 경제 수령이 마흔 살 정도라고 하니 1980년 심기 시작해 20대 후반이 된 이곳의 나무들은 지금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유기질 풍부한 검은 흙,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햇살, 화산암을 뚫고 내려간 투명한 물, 바다향기 머금은 맑은 바람이 차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서광다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가 있다. 차와 벗하며 추사는 이곳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바람과 물과 돌과 햇살이 추사와 만났으니 이래저래 제주도는 차와 인연이 깊다. 제주의 차밭은 보성이나 하동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뭍에서 멀다는 심리적인 이유가 크다. 김포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닿는 곳이니 말이다. 제주에서는 청명 즈음해 찻잎을 따기 시작한다. 올해는 4월 1일에 처음 땄다. 곡우 즈음해 수확을 시작하는 보성보다 보름쯤 이르다.

차밭의 절정은 4월 말에서 5월 초다. 찻잎 하나를 따 하늘에 비춰 본다. 아이의 살갗처럼 맑고 보드랍다. 옅은 잎맥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그래서 녹차의 맛이 투명한가 보다.

# 내 손으로 따고 덖고

주말에 제주도 갔다가 서광다원에 들르면 괜찮은 체험을 하나 할 수 있다. ‘설록 페스티벌’이 그것이다. 내 손으로 찻잎을 따고, 무쇠솥에서 덖고 비벼 녹차를 만들 수 있다. 눈 가리고 설록차 맛 알아내기, 녹차 잎 카드 만들기 행사도 있다. 사진도 찍어준다. 걸어서 돌기엔 벅찬 다원을 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호사도 맛볼 수 있다. 차밭 주위엔 보리가 패기 시작했다. 차나무 줄의 모양을 잘 살펴 보라. 대부분은 윗부분이 깍두기처럼 각이 졌는데 동그스름한 줄이 있다. 일일이 손으로 수확하는 최고급 차를 따는 줄이다. 다원 안에 있는 ‘오설록 뮤지엄’에는 이 땅의 차 역사를 알려주는 패널이 있고, 선인들이 썼던 각양각색의 다기가 전시돼 있다. 한·중·일 3국의 녹차 50여 종류도 볼 수 있다. 각종 녹차 제품과 차 용품도 판다. 녹차아이스크림 하나 들고 전망대에 올라가면 차밭 전경이 품 안에 들어온다.

Tip

■ ‘설록 페스티벌’은 다음달 1일까지 계속된다. 주말과 공휴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료 3000원. 4인가족권 1만원. 문의 064-794-5312. 홈페이지 http://www.sulloc.co.kr

■ 아모레퍼시픽에서는 ‘설록명차 장원’을 올해 처음 내놨다. 서광다원에서 처음 수확한 어린잎으로 만들었다. 60g에 100만원, 300통 한정품이다.

■ 보성 다향제는 3일부터 6일까지다 (http://dahyang.boseong.go.kr). 하동 야생차문화 축제는 21일부터 25일까지다(http://festival.hadong.go.kr)

<제주>글=안충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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