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56. 길 선생의 사랑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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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필자는 신혼 초 길옥윤씨의 일본 활동 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갔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오는 우리 부부.

사흘이 넘도록 연락 두절인 남편을 도박판에서 찾아냈다. 그런 남편을 데리고 들어와서 웃을 수 있는 아내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길옥윤 선생은 도대체 이런 상태로 어떻게 도박이나 했을까 싶을 정도로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가수 패티 김이 아니라 여자 김혜자일 수밖에 없었다.

길 선생이 그렇게 며칠씩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으면 집에서 기다리는 나는 정말이지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 남편 걱정에 잠을 못 이뤘다. 그러다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그에게 그동안 쌓인 미움을 한꺼번에 쏟아내곤 했다.

나도 여느 부인처럼 며칠씩 남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잔뜩 뿔이 나 있는데도 길 선생은 달랠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속상한 아내를 위로해줄 만큼 말 주변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말 없이 본 체 만 체하고 있으면 그는 ‘제풀에 꺾이겠지’하며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저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때로는 그런 모습이 내 화를 더 돋웠다.

그렇게 며칠씩 냉전이 계속됐다. 그 다음에야 길 선생은 제자를 시켜 내 방으로 악보 한 장을 들여보냈다. 제목은 ‘사랑하는 당신이’였다.

사랑하는 당신이 울어버리면

난 몰라 난 몰라

나도 같이 덩달아 울어버릴까

난 몰라 난 몰라

아니 아니 울지 말고 달래줘야지

쓰다듬고 안아줘야지

둘 없는 내 사랑 당신이니까

사랑하는 당신이 화를 내시면

난 몰라 난 몰라

나도 같이 덩달아 화를 낼까봐

난 몰라 난 몰라

니 아니 무릎 꿇고 빌어야 하지

그러면은 용서하겠지

정다운 내 사랑 당신이니까

사랑하는 당신이 먼저 죽으면

난 몰라 난 몰라

나만 혼자 남아서 살 수 있을까

난 몰라 난 몰라

아니 아니 나도 같이 따라갈 테야

사랑하는 당신 곁으로

둘이는 나란히 잠이 들꺼야

자신이 쓴 노랫말처럼 쓰다듬고 안아주든 무릎을 꿇고 빌든 그도 나를 달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까? 하지만 프러포즈도 정식으로 안 했던 길 선생은 정작 말로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고 지순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곧잘 인용되는 영화 ‘러브 스토리’의 명대사가 있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 속 이야기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때론 빈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에 다시금 가슴이 뛰고, 돌아서면 또 속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에 쌓였던 미움도 씻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부의 정인 것이다. 사과의 의미를 담은 곡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사과를 대신하는 길 선생은 감정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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