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산수유꽃나무에 말한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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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산수유꽃나무에 말한 비밀’- 서정주(1915 ~ 2000)

어느날 내가 산수유꽃나무에 말한 비밀은

산수유 꽃속에 피어나 사운대다가……

흔들리다가……

낙화(落花)하다가……

구름 속으로 기어 들고,

구름은 뭉클리어 배 깔고 앉었다가……

마지못해 일어나서 기어 가다가……

쏟아져 비로 내리어

아직 내모양을 아는이의 어깨위에도 내리다가……

빗방울 속에 상기도 남은

내 비밀의 일곱빛 무지개여

햇빛의 푸리즘 속으로 오르내리며

허리 굽흐리고

나오다가……

숨다가……

나오다가……


“아주머니 소근거리는 귓속말씀은/칠(七)월달 감나무 같긴 하오나,” “당신네 집 제일 예쁜 어린 애기는/칭얼칭얼 늘 그냥 그럴 뿐이지/어디메 귓속말이나 할 줄이나 알아요?”(‘귓속말’). 시인이 아주머니처럼 산수유나무에 대고 귓속말로 소곤거리다니 이게 웬 말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어린 아기의 칭얼대는 늘 그냥 그럴 뿐인, 그야말로 천진무구한 말로 산수유나무에 대고 말한 것이 확실하다. 보아라, 메말랐던 산수유나무에서 꽃이 피고, 그 꽃이 흔들리다가 떨어지고 이윽고 구름 속으로 기어들어가 비로 내리니. 아! 빗방울 속에 상기도 남은 비밀의 일곱 빛 무지개는 시인이 세상에 남긴 시가 아닌가. 그러니 그런 시인을 아는 이의 어깨를 감싸며 내리는 비는 얼마나 뭉클한가.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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