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칼럼] 올림픽과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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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탄생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무려 35년이 지난 84년 LA 올림픽 때였다. 중국은 53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했으나 56년 멜버른 올림픽 때 불참했다. 올림픽에 대만이 참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57년에는 아예 IOC에서 탈퇴해 버렸다. 중국이 IOC에 재가입 승인을 받은 것은 79년. 그런데 80년 모스크바 대회 때는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미국에 동조해 보이콧했다.

이제 베이징 올림픽 개막이 10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여전히 어수선하다. 독립을 요구하는 티베트인의 시위를 무력 진압한 것에 항의해 개막식에 불참하겠다는 국가원수들이 생겨나고, 곳곳에서 시위대가 성화 봉송을 방해하기도 한다. 중국은 “올림픽을 정치화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것이 명백한 것 같다.

IOC가 제정한 ‘올림픽 헌장’에는 올림픽이 순수해야 하고,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올림픽의 목적은 인류의 평화를 유지하고 인류애에 공헌하는 것이다’(제1조)라든지 ‘국가 또는 개인에 대해 인종·종교·정치상의 이유로 차별 대우해서는 안 된다’(제3조)는 조항이 그렇다.

그러나 올림픽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만큼 지키기 힘들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근대 올림픽의 역사를 보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순수하게 치러진 대회가 오히려 적은 편이다. 독일의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올림픽 유치에 나서 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치렀다. 올림픽을 나치 이데올로기의 확산 기회로 이용한 베를린 대회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 대표적 대회로 꼽힌다. 힘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이 총력을 다해 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한 것도 ‘순수’와는 거리가 멀다.

72년 뮌헨 대회는 인질 사태로 모두 17명이 목숨을 잃은 ‘피의 올림픽’으로 기록돼 있다.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에 침입한 팔레스타인 테러 집단 ‘검은 9월단’의 요구 사항은 ‘이스라엘에 수감돼 있는 팔레스타인 포로 석방’이었다. 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항의하는 60여 개국이 보이콧해 반쪽 올림픽으로 치러졌고, 84년 LA 대회는 동구권의 보복 보이콧으로 역시 반쪽 올림픽이었다. 모스크바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영국의 조정선수 클린 모이니한은 “올림픽에 정치가 끼어들면서 나는 평생 꿈을 접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올림픽에 자꾸 다른 요소가 끼어드는 이유는 뭘까. 올림픽이야말로 나의 주장을 세계 만방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올림픽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각국의 언론이 취재 경쟁을 하는 월드 이벤트다. 언론에 노출될 수만 있다면 과격한 방법이라도 동원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올림픽 성화 채화식을 기점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이 야심 차게 준비한 역대 최장 구간 성화 봉송은 시위대에 의해 곳곳에서 방해를 받고 있다. 파리에서는 세 차례나 성화가 꺼졌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봉송 구간이 변경·축소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드디어 27일 한국에서 성화 봉송이 진행된다. 이미 봉송 주자 중 여러 명이 봉송 거부 의사를 밝혔고, 인권단체에서는 이날 대규모 시민대회를 열어 성화 봉송을 저지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성화 봉송 구간을 알리지 않는 것은 물론 구간 변경도 생각하고 있다 한다.

나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좋다. 성화 봉송이 주장을 널리 펼치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봉송을 방해하는 것은 안 된다. 그것은 폭력이다. ‘폭력을 반대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쓰는 꼴’이다. 중국이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한국인이 제법 있다. 역사 왜곡 문제, 탈북자 강제 북송, 혐한류 확산 등으로 나빠진 이미지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 하더라도 베이징 올림픽은 잘 치러져야 한다. 올림픽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다. 주의, 주장이나 이념을 떠나 세계의 튼튼한 젊은이들이 힘과 기량을 겨루는 무대에서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손장환 기획취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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