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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41.독립운동가 金山 재조명 下.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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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김산은 『아리랑』에서 30년에 제1차 체포됐다가 31년 형기를 마친뒤 병들어 얼마간 머무르기 위해 하이디엔(海淀)으로 가옌징(燕京)대학 근처에 안창호(安昌浩)가 새 마을을 꾸리던 조선인의 염소목장에 갔다고 했다.님 웨일스도 30 년대 중반 옌징대학 근처에서 살 때 조선인 목장에서 공급하는 염소젖을 먹은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하이디엔에 있는 조선인 염소목장에 주의력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사실 그곳은 베이징(北京)에서 활약하던 조선 독립투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그 염소목장의 주인은 구한(舊韓)말 독립투사였던 김기창(金基昌.1872~19 50)이었다.김기창은 일찍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했고 1912년 「105인사건」때 검거돼 거문도에 1년간 유배당했다.김기창의 차녀 김신정(金信貞)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부친은 이승만(李承晩)과 기독교청년회에서 같이 활동했고 윤치호(尹致昊).이승훈(李昇薰)과도 가까이 지냈다.14년 중국으로 망명한 부친은 베이징 동쪽 퉁(通)縣에 자리잡았다.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정요인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중 김구(金九)선생이 소박한 옷차림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부친은 26년 하이디엔으로 이사와 35년까지 염소목장을 경영했다.이곳은 마치 독립투사들의 초대소 마냥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곤 했다.안창호.김규식(金奎植).양명(梁明 ).안공근(安恭根)등이 주요 인사였고 김산과 한위건(韓偉健)은 제집처럼아주 친하게 다녔다.』김신정은 김산이 베이징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자기집 울안에서 찍은 것이라고 확증했다.그 사진을 보면 김산은 양복을 입고 석가산(石假 山)옆에 서서 깊은생각에 잠겨있고 멀리 담밖에는 수풀이 가득차 있다.
두번째 체포됐다가 풀려난 34년 초 김산은 자오야핑(趙亞平)과 결혼했다.趙는 허베이(河北)省 안궈(安國)縣출신으로 31년바오딩(保定)여자사범학교에 다니면서 반제대동맹(反帝大同盟)에 참가해 학생운동에 나섰다 퇴학당하고 베이징에 와 당조직을 찾는과정에서 김산을 만났다.김산과의 첫만남을 趙는『32년 베이징에서 처음 만났을 때 친절함을 느꼈다.내가 정치이론을 학습하고 싶다고 말하니 그러면 자기를 찾아 오라고 했다.그후 나는 매 주일에 두번은 찾아가 단독으로 그 의 강의를 들었다.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그의 곡절많은 경력도 알게돼 관계가 밀접해져 32년말부터 동거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두사람은 33년5월 경찰에 같이 체포됐다가 풀려나온 뒤 베이징에서 조그마한 집을 얻어 가정생활을 시작했다.趙는 『김산은 매일 오전은 베이징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고 때로는 문장을 번역했다.나는 가정교원을 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유지했 다.35년 김산은 석가장(石家莊)에 가 변호사 집에서 일본어강습반을 꾸리면서 당조직재건사업에 나섰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산이 옌안(延安)으로 가자 趙는 고향으로 가 항일활동을 계속했고 37년 4월 아들을 낳았다.그가 바로 고영광(高永光)이다. 김산이 다시 활동을 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당적 회복문제였다.김산은 35년 석가장에서 복당(復黨)하려고 했지만 복당을 보증해 줄 사람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상하이(上海)로갔다.거기에서 다시 복당하려고 했으나 당중앙을 찾아 가라고 해도중에 난징(南京)에 들렀고,다시 톈진(天津)에 들러 복당 신청을 했다.여기서도 성과가 없자 김산은 위험을 무릅쓰고 당중앙이 있던 옌안으로 갔다.
37년 봄 당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옌안에 머무르고있던 이서휘(李徐輝)는 김산을 만났다.
『나는 33년 난징에서 박건웅을 만나 베이징에 장지락이라는 대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장지락을 직접 만나기는 37년초다.그때 서북항일구국청년 대표대회가 옌안 항일군정대학에서 열렸다.회의기간중 어느날 저녁 고급간부 옷차림을 한 사람이 우리숙소에 왔다.그는 우리에게 광저우(廣州)봉기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나는 원래 들은 바가 있기에 장지락을 아시는가 물으니바로 자기라고 말했다.그때 그는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문제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38년 5월 김산은 장티푸스로 입원해있는 한위건을 방문했다.김산과 한위건은 이 자리에서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는데 마지막에는 꿇어앉아 울었다고 한다.한위건(일명 李鐵夫)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철부는 우리 당 실사구시(實事求 是)의 모범』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현재 중공당사(中共黨史)연구에서 조선사람 중 제1인자로 평가된다.그러나 한위건은 김산과는 복당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두 사람의 갈등에 대해 이서휘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韓이 국내에서 활동하다 상하이로 도망쳐 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려 할 때 중공당내에서 영향력이 큰 김산이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았다.그후 한위건은 베이징에 가 반제대동맹 당단(黨團)서기가 됐다.31년 장지락이 제1차 체포됐다 베이징 에 돌아왔을때 韓은 당내에서 발언권이 있는 위치였는데 심사때 반대의견을 들고 나와 장지락은 당적을 제때에 회복하지 못했다.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그들의 갈등은 옌안에 와서 해소됐다.』그들은 혁명목적이 같았고 두 사람 모두 좌경기회주의 노선의 피해자였다.
38년 陝甘寧邊區보안처에서는 김산의 경력을 심사했다.「반역자는 아닌가」「일본의 간첩은 아닌가」라는 많은 의심을 가지고 심사했지만 결론내릴 근거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해 10월19일 『완전히 조사할 수 없는 형편에서「일본간첩」으로 처형한다』는 결정이 채택됐다.강생(康生.37년까지 코민테른에서 활동,73년 당부주석,75년사망)이 직접 사인한 이 지시서에 의해 김산은 전선으로 가는 도 중에 죽음을 당했다.그때 나이가 33세에 불과했다.그러나 당중앙선전부 간부로 활동하고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의하던 김산이 왜 갑작스럽게 처형됐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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